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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 산행후기 ³°″/일상이야기

경주 다녀오며『대왕암과 감은사지 & 이견대』'18.7.29





♧ 이견대에서 바라 본 대왕암 ♧




▶ 이견대(利見臺)


이견대는 신라 문무왕의 혼이 깃든 대왕암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정자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문왕은 681년에 즉위하여 호국용이 된 부왕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를 창건하고, 용이 된 아버지가 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두었다고 한다. 그 다음 해에 감은사 앞바다에 작은 산이 떠내려오자 신문왕이 이견대로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보았으며, 며칠 쉬에 신문왕이 그 산으로 들어가 용을 만나 검은 옥대를 받았다. 또한 관리로 하여금 산 위에 있던 대나무를 베도록 하였는데, 그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바로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한다는 만파식적으로 그 후 나라의 보물로 삼았다고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이견대라는 명칭을 중국의 주역에 있는 글귀인 "비룡재천 이견대인"에서 빌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서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신뭉왕이 세웠던 이견대는 없어졌지만 1970년 발굴로 건물지를 확인하였으며, 1979년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이견정을 이자리에 새로 세웠다고 소개하고 있다.








▣ 만파식적(萬波息笛)






 

만파식적의 기적


동해에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니 신문왕이 나가 살펴보았다. 산 위에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이틑날 합하여 하나가 되니 풍우가 일었다.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나와 검은 옥대를 바치면서 "한쪽 손바닥을 치면 소리가 없고 두 손이 마주치면 소리가 나듯이, 이 대나무도 합쳐야만 소리가 나니 성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대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바다용이 된 선왕(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장군이 합심하여 이 보물을 나에게 갖다 바치게 하였습니다" 하고 하였다. 피리를 만들어 천존고에 두었는데 이것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 비가 오고 비올 때 개이며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도 평정해졌다.







 함월산 용연폭포(龍淵瀑布)


옥대 장식이 용으로 변해 승천하였다는 용연폭포, 만파식적 대나무와 함께 얻은 또 하나의 보물 검은 옥대로  신문왕이 만파식적 대나무와 옥대를 가지고 환궁할 때 마중 나온 태자의 예지로 옥대의 용 장식 하나를 떼어 시냇물에 담그니 진짜 용으로 별해 천하고 시냇가는 깊이 패여 연못과 폭포가 생겨났다고 한다.

     



▒ 경주 다녀오며


연일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날씨 일요일 경주 다녀 오는 길에 태풍 종다리의 간점 영향으로 제법 기온이 내려갔지만 여전히 습하고 무더운 날씨였다. 세찬 바람에 포말 일으키는 성난 동해바다 강동 지경해안에 잠시 차를 세워 바다를 보니 제접 거칠다. 소금끼 잔뜩 머금은 바람과 부서진 포말은 체감에 더욱 성가시고 불쾌하게 끈적거린다. 오전 경주 가며 태풍 종다리 간접 영향에 바람 제법 거칠지만 하늘은 참 멋있는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지만, 오전에는 날씨가 맑았는데 오후에는 잔뜩 흐린 날씨로 돌변하였다.

 

경주 다녀오는 길, 잠시 짬내어 죽어서도 동해를 지키는 대왕암과 이견대, 감은사지를 다시 찾아 보았다.




지경 앞 바다

















지경 방파제
















지루하지 않으려 해안으로 드라이브 경치구경을 할 요량으로 토함산 석굴암에 올르고...


태풍 종다리 간접 영향으로 바람 시원하게 부니 좋을 듯 하였는데...




석굴암 범종각











건너다 본 경주 남산과 고위봉


우측 뒤로 건천 오봉산과 단석산 좌측으로 치술령 뒤로 영암알프스가 일렁거리지만 시야 탁하니 아쉬움이다.















석굴암 주차장 할매들 난전...또 한우큼 팔아 주고...


경주 목적지로 달려 내려주고...나는 다시 울산으로 빽~!


심심풀이로 왕의길...굳이 추령옛길를 넘어 감포 아래 이견대에서 멈추었다.




대왕암을 가장 잘 볼수 있는 이견대





▶ 이견대 안내










이견대 앞은 벼랑 이루고 있고, 바다와 대종천 밀물이 만나는 곳,


그 건너로 대왕암이 거센 파도를 이겨 내고 있으니, 이곳 이견대와, 저 문무왕릉(대왕암),


감은사지 이 세곳은 뗄래야 뗄수 없는 유래가 전해 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바다는 태풍영향으로 출입금지 된 상태...파도가 더욱 거칠어 진다.





이견대에서 건너다 본 대왕암






대왕암_문무대왕릉





























































이견대 망루에서...


망루에는 여러 사람들 시원한 바람 맞으며 피서를 즐기고 있는데, 이 끈적함이란,,,나는 영 적응하기 어렵다.








이견대에서 대왕암 연결고리 감은사지로 이동...




감은사지_동, 서 삼층석탑


층석탑은 높이 13.4m로 장대하며, 제작년도도 확실하다, 이중 기단 위에 몸체돌을 세우고 처마밑은 층단을 이루었으며, 지붕 위는 곡면을 이루어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인다. 1959~60년에 서탑을, 1996년에 동탑을 해체 복원하였다. 서탑과 동탑에서 금동제 사리함과 그 속에 사리가 들어있는 수정으로 만든 사리병 등이 발견되어 통일신라시대 탑곳에 사리장치 연구의 열괴가 되고 있다.






은사지사적 제31호. 〈삼국유사〉에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二塔式伽藍)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石材遺構)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원래 앞면 8칸, 옆면 4칸이었던 북쪽 강당은 후대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은 것도 밝혀졌다
















금당터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의 대왕암에 장사를 지낸 뒤, 용이 된 부왕이 드나들게끔 금당 밑을 특이한 구조로 된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금당과 서탑





금당과 동탑












































▶ 2017년 맑은날 감은사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숭고한 정신이 폭염을 확 날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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