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3년을 맞이하여 원효의 산, 불교의 성지 천성산을 찾았다.
철쭉은 조금 늦었겠지만, 구석구석 볼거리 즐길거리 의미있는 곳,
소금강산이라 부르는 천성산, 가까이 있어 늘 편안하게 들 수 있어 행복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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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원 뒤 암봉 조망처 풍경
서창_소주공단 너머 대운산 전경을 파노라마로 담아 보았다.
▶ 하늘리지(좌) 금수굴 파노라마【사진 클릭: 크게보기】
법수원 뒤 암봉에서 올려다 본 원적봉
좌측 끝에 미타암 석굴법당이 위태롭게 걸려 있고, 하늘릿지가 하늘로 솟아 있다.
우측 오버행 암벽 아래가 금수굴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름 없는 무명봉인 것이 의아 한 곳이다.
가운데 높아보이는 곳이 원적봉으로 천성산에서 빠지지 않는 비경지라 할 수 있다.
잔치봉 한켠, 한것 꽃 피운 이름모를 나무에 짱을 더하니 이런 예쁜 그림이...
금수굴 오르며 건너다 본 하늘릿지 솔봉, 삼형제바위, 옥황상제 거기시 바위가 앙칼지다.
천성산(원효산)은 이전에는 제1봉(922.2m)을 원효산(元曉山)으로 제2봉(855m, 비로봉)을 천성산(千聖山)으로 칭했다. 그러나 양산시에서 이 2개 산의 이름을 통합하여 천성산으로 변경하고, 기존의 원효산을 천성산 주봉(제1봉), 천성산을 제2봉으로 삼았다.
천성산의 유래는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1천(千)명의 스님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모두 성인(聖人)이 되게 했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효산은 원효대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대동지지에서는 이 산을 원적산(圓寂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는 이 산을 소금강(小金剛) 또는 소금강산으로도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성산은 예로부터 깊은 계곡과 폭포가 많고 또한 경치가 빼어나 금강산의 축소판이라고 불리었다. 동쪽으로는 양산시 웅상읍, 서쪽으로는 양산시 상북면에 접해 있으며 산 아래 서북쪽에 내원사가 위치해 있다. 또한 천성산에는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화엄늪과 밀밭늪이 있다. 이곳은 희귀한 꽃과 식물(끈끈이 주걱)등 곤충들의 생태가 아직 잘 보존되어 있다.
▶ 하늘리지 최고의 비경지
♧ 하늘리지 개요♧
천성산은 서쪽으로는 힘찬 산줄기가 여러곳으로 뻗어나가며 수려한 골짜기를 여러곳 빚어 놓고 있다. 반면 동쪽으로 곳곳에 기암절벽과 함께 앙칼진 암릉과 암벽이 단애를 이루고 있는데, 하늘리지 또한 동쪽 기암절벽 지대인 한켠으로 법수원 뒤로 솟구친 날카로운 암릉이다.
하늘리지는 6개의 암봉을 이어가는 등반코스로 울산 산울림산악회에서 1989년부터 약 2년여 동안 개척한 리지길로, 그 후 잊혀진 듯 했으나 1990년 중반부터 리지등반 붐이 일며 알려지게 되었다. 많은 산악인들이 하늘리지를 찾게 되자 2000년 11월 화보물 하켄과 볼트 작업을 끝내고 이듬해 2001년 9월 초 뒤늦게 개척보고회를 가졌다. 더해 워킹산악인들의 세미클라이밍 붐과 더불어 크게 인기있는 곳이 이곳 하늘리지다.
삼형제바위_하늘리지
바위 3개가 마치 형제처럼 보인다 해서 "삼형제바위"라고 한다.
조선의 사람들이 금수굴이 정동(正東)으로 향하고 있어 동틀 무렵이면 샘물이 온통 황금색을 띤다 해서 금수굴이라고 하는 상굴과 마주하고 있는 바위이다. 능선으로 이어져 있어 "하늘리지"라고도 하며 3개중 맨 앞쪽 바위를 옥황상제 거기기바위 또는 부처님처럼 생겼다 해서 부처바위라도도 한다.
▶ 금수굴_삼형제 바위와 마주 보고 있는 곳
♧ 금수굴 유래 ♧
금수굴은 신라시대 원효대사(617~686)가 천성산에서 수도하던 석굴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전해오는 곳이다.
신라시대에는 금수굴을 하늘 문이 열리는 개천 때에 맞우러 부처가 목욕하는 곳이라고 하여 "불지(佛池)"라 하였다. 또 조선의 유림들은 굴이 정동(正東)으로 향하고 있어 동이 틀 무렵이면 샘물이 온통 황금색을 띤다고 해서 금수굴이라고 했다. 이 불지는 자시(子時)와 오시(午時)에만 솟는 샘이라고 해서 자오천(子午泉)이라고도 한다.
영조 때의 성리학자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1)는 금수굴을 답사하고 "대둔사(현 노전암으로 추정) 동쪽 산위 원적봉에 석굴이 있다. 그 굴속에는 물이 가득한데 가물거나 장마가 져도 수량이 줄거나 넘쳐나지 않는다 수면에 금색을 입힌 듯해서 불지(佛池)라 하여 그 곁에 작은 암자가 있다"라는 시를 남겼다.
조선 후기 서범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도 그의 자오천이라는 한시에서 "양산의 원적산에는 불지가 있는데 일명 금수굴이라 한다. 굴속이 모두 다 금가루라 저 망천의 금설천과 서로 같다"라고 하였다.
원효는 천성산에 오기 전 태종무열왕의 둘째딸 요석공주와 3일간의 짧은 사랑을 나누고는 실계(失戒)의 비탄을 유랑의 수도로 달랬다. 이 때 부터 세상을 떠돌며 수도하던 대표적인 수도처가 천성산이다. 그가 수도하던 석굴로는 적멸굴을 비롯해 미타암석굴, 만고굴, 금수굴, 등이 있으며 지금까지도 지명으로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
금수굴을 보고, 암벽을 감아 돌아 무명암봉에 올라 간단한 오찬을 즐겼다.
그리고 걸뱅이 잔치봉, 원적봉을 지나 철쭉군락을 보러, 예상은 했지만
주말 양일간, 뜨거운 날씨로 철쭉은 많이 녹아 내린 상태로 아쉬움을 달랴야 했다.
▶ 천성산 철쭉군락
시들어 가는 천성산 철쭉, 곧 봄이 또 떠나간다는...!
천성산 철쭉군락, 매년 활짝 핀 철쭉을 즐기던 곳 이었는데
아쉬움에 지난해 철쭉꽃 사진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 지난해 철쭉
▶ 미타암 큰법당_불기 2,563년 공양
▶ 굴법당_미타암석아미타불 입상
미타암 굴법당 아미타불【보물: 998호】
미타암의 석굴사원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불은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이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육계(肉?)와 어깨까지 내려온 긴 귀, 풍만하면서도 우아한 인상, 왼손을 몸에 붙여 곧바로 내리고 오른손을 가슴에 댄 모습, 둥근 어깨와 평편한 가슴 그리고 대좌 위에 곧바로 선 자세 등에서 통일신라(719년) 때에 만들어진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피은(避隱) 8에 기록된 서방 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 비구(比丘)도 이 석굴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자연동굴이지만 인공을 가한 흔적이 뚜렷하여 8세기 통일신라 불상양식의 한 계보를 살펴 볼 수 있다.
▶ 미타암 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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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이름: 동부 천성산_잔치봉, 원적봉
▣ 위 치: 경남 양산 하북면/ 상북면 대석리/ 웅상 소주동
▣ 코 스: 백동(전원주택)_P→ 원적암→ 법수원골→ 혈수폭포_상류(계곡건넘)→ 법수원 뒤 암봉→ 금수굴→ 무명암봉→ 잔치봉→
원적봉→ 철쭉군락_제단→ 미타암→ 백동(전원주택)_P 【10:00_입산~16:40_하산】
▣ 일 시: 2019년 5월 12일(일)_불기 2,563년(부처님오신날)
▣ 날 씨: 맑음
▣ 일 행: 조릿대와 짱
▣ 이 동: 자가운전_왕복 60km_울산출발: 09:00/ 도착: 17:30
▣ 비 용: 부처님오신날_미타암 공양비: 5,000원/ 짱은 비밀_많이 했다고
♧ 포토 에세이 ♧
불기 2,563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불교의 산 천성산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하고 늦으막히 출발, 소금강으로 불리우는 천성산은 부처의 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특히 필자가 이곳을 자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80년대부터 묵은 추억이 많은 곳으로 회사 야근을 마치면 유일하게 버스 한번만 타면 다녀 올 수 있는 곳이라 집 대문 드나 들 듯 했던 곳이다. 특히 동부 천성산은 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원적암은 절이라 말할 수 없었고 법수원은 자유롭게 지날 수 있었으며 미타암은 자그만한 법당과 석굴에 미니 석불 노상에 안치 해 놓고 있었던 시절 미타암 석굴 앞 바위에 앉아 있으면 그도록 편안할 수 없었다. 미타암이 발전하며 석굴 앞을 법당으로 축조하여 지금의 굴법당이 되었으니,. 참으로 세월이 유수와 같다 할 수 있다.
법수원 마루에 앉아 쉬던 때와 달리 10여년 전부터 산쟁이들과 어떤 철천지한 원수가 되었는지 등로를 차단하고 앞, 뒤 대문까지 걸어 잠그더만 이제는 애둘러 가시철망까지 겹겹이 처놓아 사람 접근을 막고 있으니 대단히 유감이고 아쉬울 뿐이다. 하물며 부처님오신날까지 사람발길 마다하고 있느니, 정말 아이러니 하다.
가까운 곳에 있어 늘 편안하게 드는 천성산…금수굴, 미타암 공양으로 마무리 한 부처님오신날 짧은 산행 또 한 추억으로 남겨 봅니다.
이곳에 오면 늘 그렇지만, 백동 전원주택지 앞 공터에 패킹 후 산행채비를 한다.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많이 변해버려 옛 정취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또 늘 그렇듯, 이곳에 오면 좌측보다는 우측 원적암으로 버릇처럼 산문에 들어 선다
당겨서 본 미타암
범상치 않는 암벽과 단애, 좌측 미타암 굴법당이 걸려 있고 우측 금수굴 단애가 올려다 보인다.
중간에 하늘리지 삼형제 바위가 톱날처럼 보이고 있다.
원적암 다리 건너면 원적암 법당
원적암
한마디로 무명암자 였던 곳, 그래도 이제는 어였하게 대웅전과 별, 산채까지 들어서 있다.
2563년 부처님오신날, 한 어르신이 법당 계단이 부담스러우신지 숨을 몰아 쉬쉬며 원적암 앞 평상에 앉아 계시고, 온 젊음, 혼신을 다해 살아오신 연륜이 깊게 패인 주름이 말해주고 있다. 어르신...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기원해 보았다.
원점암을 끼고 좌측 산길 접어들며, 조금 오르면 원적암 별채, 산신각인지...모를 !
원적암 별채 지나, 잠시 오르면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 보인다.
무명폭포 위 와폭
내려다 본 무명폭포
폭포가 깊어 내려다 보면 그 길이 알수 없다.
계곡을 건너면 미타암과 법수원 가운데로 바로 오르는 등로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등로 초입 샘터가 있다.
▶ 계곡 건너 샘터
미타암과 법수원 가운데로 바로 오를 수 있는 등로를 확인 하고
우리는 금수굴을 가기 위해 다시 계곡 건너와 되 돌아 왔다.
옛 등로 많이 묵어 있어 족적 희미할 정도...80년대 가장 많이 애용했던 등로다.
법수원이 가로막혀 있으니, 애써 이곳을 오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사 심한 옛 등로 올라, 첫번째 쉼터 물소리 들리는 너럭바위 절벽 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또 경사심한 된비알 치고 오르면 칼바위 조망처를 만난다.
참으로 오랜만에 재회 하는 듯 하고, 그곳에 이제는 짱이 올라 서 보았다.
이곳은 미타암과 하늘리지 금수굴을 올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 미타암과 하늘리지 금수굴 암벽을 담는 내모슴
칼날바위에서 올려다 본 미타암, 하늘리지, 금수굴이 있는 단애
언제 보아도 멋드러진 곳, 특히 겨울이면 더 매력적인 것은 내 취향 탓인가...!
미타암과 하늘리지
좌측 미타암 굴법당이 절벽 중간에 매달려 있고 우측 하늘리지는 날를 잔뜩 세우고 있다.
▶ 법수원_현재 활산선원
법수원_활산선원
역시 혈수폭포 건너는 다리 문은 굳게 잠겨있고...더 추가 작업하여 겹겹이 가시 철조망까지 쳐 놓았다.
문 걸어 놓으면 들어설 이 없을텐데...낮은 포폭 정도 해야 할 철조망이 겹겹이 쳐저 있으니...참내원~!
무슨 철천지한 원수를 졌길래 이렇게 마음에 문을 걸어 잠구었을까...도저히 이해 불가라 할 수 있다.
등산객으로 인해 수양에 얼마나 방해 되는지는 알수 없으나, 사람 발길 거부하고, 수도하여 경지 다다른들 무슨 소용있겠는가...!
그래도 부천님오신날이라 그런지 못 알아들을 불경소리가 흘러 나온다.
법수원 옆 너덜지대
줄줄 밀리는 너덜을 올라야 하고, 경사 심해 짧지만 용을 쓰고 올라야 한다.
오동나무 꽃
너덜지대 올라 내려다 본 법수원
예나 지금이나 변한것 없는 것 같은...즉은 발전이 없다는 예기다.
혈수폭포 상단
벼랑 끝에서 내려다 본 혈수폭포 상단 이곳 역시도 철조망이 가로막혀 더 들어갈 수 없다.
법수원 다리에서 올려다 보던 웅장한 혈수폭포가 그립긴 하다.
아래 사진 우측 위 벼랑끝에서 내려다 본 혈수폭포 상단부다.
▶ 내려다 본 혈수폭포 상단
천혜의 명당 법수원
이곳이 천하의 명당이면 어떻고 천하의 비경지면 뭐할까...불도에서 말하는 초심이 비우라 하지 않았던가...!
옛 법수원은 이곳 동부 천성산의 길목이며 로터리인 셈인데, 이젠 하늘리지, 금수굴을 가려면 좌.우로 애써 애돌아야 하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오신날임에도 사람 흔적 없는 휑한 법수원을 뒤로하고 계곡 따라 오른다.
혈수폭포 상류, 법수원에서 쳐 놓은 철조망 끝지점 지나 다시 계곡으로 내려 서야 한다.
새로운 길목 포인트
골따라 계속 오르면 절쭉제단과 천성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계속을 건너 능선을 하나 넘어야 한다.
법수원계곡에서 하늘리지와 금수굴을 가는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능선까지 줄~줄~밀리는 자갈길 치고 오른다_아래 사진
금수굴 능선에 오르면 좌측, 법수원 뒤 암봉에 올라서 보시 길...!
천혜의 조망처라 할 수 있으며, 천하명당이라 할 수 있다.
법수원 뒤 암봉 오르기
바위길 올라 서면, 좌/ 우로 길게 뻗은 조망바위에 올라 서게 된다.
좌측으로 소나무 그늘도 있고, 우측으로 조망이 탁 트이는 곳이 있다.
▶ 짱 폰에 찍힌 내모습
▶ 조망바위에서 본 풍경
조망바위에서 본 하늘리지
▶ 짱 위치에서 파노라마 뷰【사진 클릭: 크게보기】
금수굴 단애
서창 넘어 대운산 전경
좌측부터, 뒤로 대운산 2봉, 우측으로 대운산, 가운데 불광산, 삼각형 삼각산, 석은덤, 우측 함박산...!
멀리 가운데 삼각형_달음산
▶ 조망바위에서 180도 파노라마 뷰【사진 클릭: 크게보기】
조망바위에서...
좌) 하늘리지, 중앙) 원적봉, 우)금수굴 단애
▶ 금수굴 오르며 건너다 본 하늘리지 솔봉
▶ 하늘리지_삼형제바위 조망바위 도착【사진 클릭: 크게보기】
▶ 조망 바위에서 본 삼형제바위
조망바위에서 삼형제바위 여러컷 담기, 버리기 아까워 몽땅 심어 놓지만, 역광이 아쉽다.
이미 신록 우거진 산빛, 봄은 저만치 떠나는 듯 하고, 곧 여름 성큼 다가 올 듯 하다.
필자도 한 컷
삼형제바위(하늘리지) 조망바위 남기고, 돌아서 금수굴을 향해 오른다.
잠시 된비알 오르면 희미한 길은 크기 알수 없는 암벽이 가로막고, 족적은 좌우로 갈린다.
좌측은 잔치봉 오르는 길이고, 우측은 금수굴 오르는 길로 우측을 놓지지 말아야 한다.
▶ 금수굴_아래 중앙
금수굴, 안은 기도 흔적이 남아 있고, 앞 좁은 터에는 작은 움막이 있다.
굴안 우측은 샘이라 할 수 있는 물 있지만 고여 있어 탁하다.
♧ 금수굴 유래 ♧
금수굴은 신라시대 원효대사(617~686)가 천성산에서 수도하던 석굴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전해오는 곳이다.
신라시대에는 금수굴을 하늘 문이 열리는 개천 때에 맞우러 부처가 목욕하는 곳이라고 하여 "불지(佛池)"라 하였다. 또 조선의 유림들은 굴이 정동(正東)으로 향하고 있어 동이 틀 무렵이면 샘물이 온통 황금색을 띤다고 해서 금수굴이라고 했다. 이 불지는 자시(子時)와 오시(午時)에만 솟는 샘이라고 해서 자오천(子午泉)이라고도 한다.
영조 때의 성리학자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1)는 금수굴을 답사하고 "대둔사(현 노전암으로 추정) 동쪽 산위 원적봉에 석굴이 있다. 그 굴속에는 물이 가득한데 가물거나 장마가 져도 수량이 줄거나 넘쳐나지 않는다 수면에 금색을 입힌 듯해서 불지(佛池)라 하여 그 곁에 작은 암자가 있다"라는 시를 남겼다.
조선 후기 서범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도 그의 자오천이라는 한시에서 "양산의 원적산에는 불지가 있는데 일명 금수굴이라 한다. 굴속이 모두 다 금가루라 저 망천의 금설천과 서로 같다"라고 하였다.
원효는 천성산에 오기 전 태종무열왕의 둘째딸 요석공주와 3일간의 짧은 사랑을 나누고는 실계(失戒)의 비탄을 유랑의 수도로 달랬다. 이 때 부터 세상을 떠돌며 수도하던 대표적인 수도처가 천성산이다. 그가 수도하던 석굴로는 적멸굴을 비롯해 미타암석굴, 만고굴, 금수굴, 등이 있으며 지금까지도 지명으로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
▶ 금수굴 안내_위 내용
▶ 금수굴 위 더 깊은 석굴 들어다 보기
금수굴 위 석굴 들어다 보기, 기어 올라 들어다 보니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깊이는 약 6~7m 정도, 기어 들어가야 할 정도다.
좁은 석굴은 6~7m 전방에서 우측 상부로 계속 이어지는 듯 하다.
올려다 본 오버행 거대 암벽에 기가 죽기 충분하고...
더이상 금수굴을 탐하지 않고 물러 난다.
왜 진작 이런 기웃거림을 하지 않았는지, 왜 진작 몰랐을까 !!!
금수굴을 충분히 살피고 얼마 남지 않은 무명 암봉에 오른다.
잔치봉과 이어진 능선 암봉 조망처, 금수굴이 있는 암봉 정상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 서면 일망무제 조망을 즐길 수 있는데, 무명봉이라는 것이 의아한 곳이다.
무명암봉에서 건너다 본 밀반늪
중앙 813봉 사면이 죄다 밀밭늪이며 우측봉은 796이다.
무명암봉에서 건너다 본 천성산(비로봉)
올려다 본 원적봉
▶ 무명암봉에서 간단한 오찬
미타암 공양도 해야 하니...허기 오지 않을 양으로 오찬을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무명암봉에서 얼마 남지 않은 진치봉을 오른다.
▶ 잔치봉 도착
잔치봉에서 근사한 쌍동이 솔 두그루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축구장만 한 너럭바위 지대로 천성산의 중앙부에 위히하여 있어 조망이 훌륭하다.
▶ 잔치봉 즐기기
♧ 잔치봉 유래 ♧
잔치봉은 말그대로 잔치를 벌였던 장소이다. 천성산 아래 웅상지역은 평산마을, 주남마을, 삼호마을 등 여러마을이 있다. 옛날 동경사회 시절 이러한 마을에서 수시로 일어났던 혼사, 장례 등 각종 경조사 때 또는 평시에도 걸인들이 각 마을로 내려가 동냥을 하여 모아 온 음식들을 한데 모아 모든 걸인들이 함께 나눠 먹으며 애환을 달래고 정을 나누던 장소라고 한다.
또한 치열했던 민족상전의 6.25 동란이 끝난 직후 복서쪽 아래 깊은 골짜기에는 미처 북으로 가지 못한 빨치산들이 은신하며 이 잔치봉을 통해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약탈을 일삼는 등 이 잔치봉이 은신처의 창구열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출처: 원적봉 정상 안내문】
잔치봉에서 건너다 본 원효산
건너 철쭉군락 색감이 영~예상처럼 양일간의 무더운 날씨로 꽃이 많이 녹은 모양이다.
잠시 후 가야 할 원적봉
천성산(비로봉)을 배경으로...
잔치봉 쌍동이 솔
잔치봉을 충분히 즐기고 철쭉군락을 살짝 당겨 보았다.
역시 철쭉을 기대하지 말아야 할 듯 하지만, 그래도 가 볼 예정이다.
잔치봉에서 원적봉을 오르다 좌측 하늘리지 쪽으로 진행하였다.
살짝 당겨서 본 금수굴 단애
건너다 본 천성산(비로봉)
▶ 원적봉 도착
원적봉은 신라시대 원효대사(617~686)의 설화와 불교의 성운이 서린 성지이다. 천성산의 옛 이름은 원적산이다. 원적이란 모든 덕이 원만하고 모든 악이 적멸하는 즉, 모든것이 부족함이 없이 가득하고 번뇌의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산이라는 뜻이라 한다.
원효대사는 이곳에서 수도하며 당나라에서 온 천명의 제자에게 화엄경을 설한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원효는 소년시절 화랑도에 들어가 수련하다가 황룡사에서 스님이 된 뒤 당시의 풍조에 따라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도중 굴속에서 잠을 자다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는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득하고 되돌아 왔다.
원효는 이곳 천성산에서 수련정진하며 득도한 뒤 일심사상, 화쟁사상, 무애사상, 등 3대 불교사상체계를 정립시겼다. 철저한 자유는 민중심에 있고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는 원효의 화엄사상은 바로 이 곳 천성산을 무대로 구전되어 내려오는 수많은 원효설화에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원효는 646년경 이곳 천성산에 원효암, 미타암을 비롯해 89개 암자를 세웠다. 『천성산 조계암 상량문에 기록"』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9개 암자에 불과하고 대부분 멸실되었거나 터만 남아 주춧돌만 남아 있는 곳이 있다.【출처: 원적봉 정상 안내문】
원적봉 정상에서 건너 원효산
원적봉에서 건너다 본 천성산(비로봉)
아무도 없는 원적봉을 남겨두고 이제 철쭉군락 철쭉 보러 이동...!
미타암에서 올라오는 안분 쉼터는 공양 후 철쭉 보러 올라 온 이들이 쉼을 하고 있다.
철쭉군락 바로 갈수 잇는 우측길 버리고 붓세바위 이어지는 능선으로 진행~
내려다 본 철쭉군락과 위로 원효산
돌아 본 원적봉과 좌측아래 바위 잔치봉
천성산(비로봉)도 한번
철군꾼락 위 무명봉에서 철쭉군락으로 내려 선다.
이미 예상을 했기에 큰 기대 하지 않고 내려서는 철꾹군락...!
그래도 이 봄이 가기전에 이곳 철쭉을 본다는 것에 의미 두고...!
▶ 천성산 철쭉군락 즐기기
이미 지난주에 보성 초암산에서 철정으로 치달은 철쭉을 모았기에 별 흥이 없지만...
그래도 천성산 철쭉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에 퇴색되어 가는 철쭉이지만 충분히 즐기리로 하고...
▶ 과년도 추억 철쭉 사진
너무 화사했던 지난 추억 사진을 보니 좀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해피한 순간인지...모르지 않기에 어린애 처럼 즐긴다.
철쭉군락을 한바퀴 돌아 보고, 미타암으로... 점심시간 피한 터
공양하는 불자님들이 좀 줄어 들었을 것을 기대하고, 쉬엄쉬엄 걸음을 옮겼다.
평소 많은 불자님들이 찾는 미타암이라 복잡한 시간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조망바위에서 대운산 한번 건너다 보고...
멀리 달음산도...
멀리 금정산도...
▶ 미타암 도착
얼마 전 새로 증축한...삼성각
입 가시고...
미타암 큰법당_대웅보전
천성산 미타암은 해발 812m의 천성산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효대사가 창건한 89암자 중 하나로 대한불교 조계종 통도사의 말사이다.
천성산 화엄벌 동쪽 아래에 있는 미타암에는 천하의 신비를 간직한 아미타불입상(보물 제998호)이 자리하고 있다. 미타암은 이 아미타불입상이 모셔진 석굴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도량으로 추정된다. 이 암자는"삼국유사"피은(避隱) 8에 전하는 포천산 다섯 비구의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다섯 명의 비구승이 이곳에서 아미타불을 염하며 수도하던 끝에 성불하여 서방정토로 날아갔다는 내용이다.
글법당 오르는 계단
허름한 계단에서 깔끔하게 다시 조성된 돌계단 따라 오른다.
굴법당도 새로히 층축되고...내부도 넓직하게 조성되어 있다.
돌기둥 안쪽 굴법당이 새 옷 갈아 입은 듯 느낌이니 참 좋은 환경이다.
짱은 큰법당에서도...굴법당에서도...
미타암 굴법당 아미타불【보물: 998호】
미타암의 석굴사원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불은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이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육계(肉?)와 어깨까지 내려온 긴 귀, 풍만하면서도 우아한 인상, 왼손을 몸에 붙여 곧바로 내리고 오른손을 가슴에 댄 모습, 둥근 어깨와 평편한 가슴 그리고 대좌 위에 곧바로 선 자세 등에서 통일신라(719년) 때에 만들어진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피은(避隱) 8에 기록된 서방 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 비구(比丘)도 이 석굴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자연동굴이지만 인공을 가한 흔적이 뚜렷하여 8세기 통일신라 불상양식의 한 계보를 살펴 볼 수 있다.
범종각
점심시간 지난 터라, 식당에서 공양 할 수 있을 만큼 한적해 진 미타암 공양
정갈하고 깔끔한 각종 나물 듬뿍 넣어 고추장에 비벼서 맛있게 먹고, 하산길 접어 들었다.
이타암 입구 입석
길은 있으나 드나들지 못하는 법수원 가는 길은 등산로 없음 푯말 덩그런히 서 있다.
어떠한 오해나 편견이 있었다면 하루빨리 풀려 법수원에 다시 사람사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불교 용어에서 필자는 개인적으로 "인연"이란 말을 참 좋아하고 있다.
법수원 평상에 앉아 목축이며 쉬어 갔던 옛 생각이 어스름 떠 오르니, 참 아쉽기만 하다.
불기 2,563년 부처님오신날, 불교의 산 천성산에서 또 하루 행복한 추억 앉고 옵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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