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흥사 부도는 신라시대에 창건하여 폐사연도가 분명하지 않은 운흥사 고승들의 사리를 안치한 것으로 누구의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모두 7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2기는 시지정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인근 시적사에 보존 관리되고 있으며, 마을 입구에 1기, 운흥계곡 하천변에 1기, 옛 절터에 2게 및 운흥사와 관련된 수조 등 각종 부재와 함께 오랜 세월동안 흩어져 있는 것을 한 곳으로 모아 정비하였으며 나머지 1기는 어디에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부도는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높이 180∼200㎝ 정도의 크기이며, 이 가운데 1기는 무너져 있고 2기는 완전한 편이다. 이들 부도는 8각형의 대석 위에 당초무늬 하대(下臺)가 놓이고 그 위에 연판(蓮瓣)이 긴 연꽃이 조각된 상대(上臺)가 올려져 있다. 상대 위에 석종형 탑신(塔身)이 놓였으며, 탑신의 머리에 보주형(寶珠形) 꼭지를 조각해 놓았다.
운흥사는 신라 진평왕(제위579-632) 때 원효대가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고려 말 지공대사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14년(광해군6)에 대희선사가 재건하였다. "저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운흥사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으나, 1749년(영조25) "학성지"에는 관련 기록이 없어, 그 이전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운흥사는 불교 경판의 간행으로 유명하였으며, 1672년부터 1709년까지 많은 불경이 간행되었다. 운흥사지 목판본에서 나온 기록을 정리하면 16종 673판으로, 이 목판은 현재 양산 통도사에 보관되어 있다.
2001년 국립창월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학술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건물터 7동, 부도 6기, 수조 4기 등의 중요한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발견된 부도 6기 중 2기는 울산시 유령문화재 제4호 운흥사지 부도로 지정되었으며, 나머지 4기는 운흥사지 인근에 공간을 마련하여 정비하였다.
☞ 2004년 12월 16일 울산광역시기념물 제43호로 지정
☞ 울산광역시 울주군 옹촌면 고연리 산 175
↑ 운흥사는 3방이 정족산을로 둘러 쌓여 있는 천연요새
또한 운흥사를 중심으로 계곡과 산사면 평탄한 곳 광대한 터에 대나무가 빼곡히 자라고 있는데, 속살을 들어다 보면 모두가 집터로 추측되며 운흥사가 얼마나 규모가 광대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 운흥사 주변 지형
↑운흥동천 각암
운흥사 마애석각은 운흥사에 들어가는 어귀에서 오른편으로 보는 암벽에「雲興洞天」이라 크게 각자한 것이다. 동천(洞天)이라 함은 산천이 둘러 있고 경치가 뛰어난 곳을 말함인데 이 동천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따온 글로 생각된다. 운흥골(雲興谷)의 석각은 울산도호부사로 있었던 홍상빈(洪尙賓)이 각한 것이다. 홍부사는 경종 1년(1721)에 떠난 사람이니 이 글을 새긴 것이 재직기간에 새긴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운흥사는 없어진지 오래전이지만 정족산의 높은 봉우리와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는 운흥골의 수려한 자연은 변함없어 그곳 사람들은 운흥사지를 물으면 '운흥동천' 각암 네 자까지 위치까지 잘 알려주고 있다.
↑ 운흥동문 각암
누가 새겨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홍류동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 반계계곡
↑ 좌측으로 보이는 다리를 건너면 부도로 우측으로 운흥사지로 향하고...
운흥사는 웅촌면 고련리의 천성산에 있었던 신라 때에 세워졌던 옛 절이다. 울산읍지에 의하면 운흥사는 원적산에 있으며 신라의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절의 창건연대를 울산읍지는 진평왕때에 원효대사가 세운 것으로 보았으나 원효대사는 진평왕39년(617)에 출생해서 신문왕 6년(686)에 사망한 사람으로 진평왕의 마지막 연대인 53년에 절을 지었다 해도 원효의 나이 15세에 지나지 않아 창건연대는 읍지를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으며, 원효는 646년에 29세로 출가하였다. 운흥사는 그 후 고려말에 이르러 지공(指空)선사가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고 광해군6년(1614)에 대희가 다시 세운 절이다. 그러나 절의 폐사년대는 분명치 않다. 정조 10년(1786) 본 읍지에서는 弊社되었다 하였으나 순조 31년(1831) 본 읍지는 원적산에 있다고 하였으며, 고종 31년(1894) 본 읍지에서는 寺名조차 등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아 폐사한 것은 1831년 이후의 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조 숙종 때에 개간한 경판들이 많이 있었으나 절이 없어진 뒤에 이를 통도사로 옮겨 소장하고 있으며 절터에는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많은 석조물들이 남아 있다. 운흥사는 천장산(일명 원적산)의 동쪽 비탈에 위치하여 인근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지형적 조화를 이루며 세워졌다. 조선후기 숙종때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청도의 운문산과 울산의 원적산은 서로 접한 봉우리와 겹쳐진 뫼뿌리에 골이 깊어 승가에서는 수 천명의 성인이 나올 곳이며 병난을 피할 수 있는 복된 곳"이라 하였다. 옛날 운흥사의 모습을 보면, 반계 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운흥동천''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큰 암벽이 나타나고 그 아래에는 맑고 깨끗한 유리와 같은 개울물이 목포대에 흘러 내렸다. 그 곳에는 어느날 누가 새겨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홍류동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 운흥사지 터가 넓어 3장으로 담고...사신상 보이지 않는 축대 아래까지 하면 대단히 넓은 터
↑ 금당처(최상부에서) 우측부터...01
↑ 금당터에서 중앙부...02
↑ 금당터에서 좌측...03
↑ 파노라마로
↑ 수조 인 듯
▶ 2021.4.25(일)
↑ 이동하여 부도
운흥사지의 부도는 모두 7기가 있었다 하는데 한기는 흙속에 묻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문화재로 지정된 부도는 금당자리가 있었던 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2기이다.
이 부도는 지대석(地臺石) 위에 넓은 기대석(基臺石)을 얹었는데 이 기대석은 중앙부분은 한돌로 된 석면에 2구(區)의 안상(眼象) 같은 것을 둘러서 그 가운데는 꽃무늬를 양각(陽刻)하고 좌우에는 결구(結溝)한 석면에도 각각 화문을 양각한 조각법으로 4면 다 똑같이 되어 있다.
이 기대석 위에는 방형의 석면 위에 복련화(伏蓮花)를 조각한 하대석을 얹었고 그 위에는 다시 앙연화좌대(仰蓮花座臺)를 받쳤다. 그 위에 얹은 탑신은 일반형의 석종형(石鍾形)인데 이 부도는 지금 허물어지고 있어 다시 복원을 요한다.
옆에 있는 또 한기의 부도는 지대석 위에 방형의 기대석을 얹고, 그 위에 앙연화좌대를 받쳐 탑신을 얹은 간략한 일반석종형부도로 연화대를 제외한 다른 부위에는 아무 무늬의 조각도 없다. 이 부도도 넘어진 것을 다시 세운듯 한데 연화좌대를 받치지 않은 채 기단석 위에 탑신만 안치하고 연화좌대는 그대로 지상에 굴러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 2021.4.25(일)
☞ 운흥사지 둘러 보고, 내려오는 길 시적사에 들러 보았다.
↑ 시적사 대적광전
↑ 시적사 대적광전
대적광전 부처님도 사진담아가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하여 담아 보았다.
↑ 반계마을 나서 바라고고...
↑ 건너편 대운산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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