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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천왕봉 성모상은 제자리로 가야 한다』

 

 


▲ 천왕사에 모셔져 있는 성모상

천왕봉 정상에는 천년세월을 지켜온 ‘성모석상’이 있었다. 이 땅의 민중들은 현실사회의 질곡과 고통을 지리산의 신령님께 빌고 또 빌며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왔다. 성모상은 한낱 돌덩이에 불과하지만 민중들의 삶의 애환과 인간사의 선악을 파악하고 있었을 터이다. 숱한 사람들에게 황홀한 기원의 기쁨을 안겨주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지금 천왕봉 정상은 허허로운 벌판이 되어 황량한 바람만 불고 있다. 성모상의 실체는 무엇이며 왜 천왕봉을 떠났는가. 그 성모상을 만난다. 노고단 쪽의 ‘남악사’가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를 올린 곳이라면, 천왕봉의 ‘성모사’와 ‘성모상’은  민중의 신앙으로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고 보아야한다. 그 출발점은 통일신라시대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지리산 성모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시대 이승휴의 <제왕운기>로 알려져 있다. 그 실체에 대한 해석은 다섯 가지의 설로 요약 할 수 있을 것이다.
  ①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설.
  ②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설.
  ③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설.
  ④천신의 딸인 성모마고의 여덟 딸인 팔도무당 시조설.
  ⑤삼신할머니설이 그것이다.


이는 시대와 이념에 따라 제각기 적합한 방향으로 해석해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같은 논의에 대해 김영수는 “지리산 성모는 선도성모도, 위숙왕후도, 마야부인도, 무당의 시조도 아니다. 그것은 후대에 들어와 각자의 입장에서 유리한 대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성모는 지리산 산신 그 자체일 뿐이다.”(1939.11.진단학보)고 명쾌하게 정리를 한 바 있다.

지리산 성모상이 민중 주체의 신앙이었다는 것은 이미 수난을 예고하는 일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배치될 때 탄압은 피해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조선을 거치면서 유교이념이 강화 될수록 산천을 숭상하는 토착 민간신앙은 음란한 제사로 분류되어 핍박을 받게 된다.
성모상의 첫 번째 수난은 고려 말,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군이 지리산을 넘어 도망칠 때 분풀이로 성모상의 목을 내리친 일이다.

조선시대인 1558년 음력 4월에는 천연이라는 승려가 성모상을 파괴하여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다. 천연의 이러한 행동은 성리학자들에게는 극구 칭송할만한 일이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기대승과 남명 조식까지 시를 지어 극구 칭송하였다. 이 때 천연은 성모상 파괴의 이유를 다음과 같은 요지로 설명한다.

“음탕한 말을 가지고서 성모에게 더럽힘을 더하는가. 무당들은 탐욕을 멋대로 하였소. 문둥이, 벙어리, 귀머거리가 다투어 와서 정성을 바쳤소. 저승이다, 이승이다, 난잡하기 그지없고 남녀의 외설도 많기도 하였소. 추잡함과 괴변 따위가 통속을 이루어 낱낱이 말하려니 입이 더럽소.”(고봉선생 문집)

천연에 의해 파괴된 성모상은 곧 복구되었다. 민중들은 여전히 성모상을 영험한 존재인 지리산 신령으로 믿었고, 그들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사당을 부수고 성모상을 절벽 아래로 굴러버린다. 다행이 산청에 사는 한 처녀의 도움으로 천왕봉에 다시 올라 본연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된다.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성모상은 또 한 차례 수난을 당한다. 그해 11월 눈 내리는 날, 난데없이 이불보자기와 두툼한 짚 가마니가 성모석상에 씌워진다. 그리고는 굵은 밧줄이 목을 조르며 당겨졌다. 그녀는 말 한마디, 몸부림 한번도 치지 않았다.
다음해 가뭄이 들어 지리산자락의 마을에서는 소동이 일어났고, 마을 사람들은 보름동안 찾은 끝에 산청군 삼장면 내원골 어느 농부의 집에서 성모상을 찾아낸다. 그는 “꿈에 성모님이 나타나 제발 옮겨달라고 간청하기에 한일” 이라는 말만 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성모상은 천왕봉으로 돌아온다.

1972년쯤의 8월, 성모석상은 또다시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것이 천왕봉에서 마지막 모습이다. 천왕봉에서 철야기도를 마친 어느 종교단체에 의하여 두 동강이가 났다는 등 구구한 얘기가 있다. 우상물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다. 1987년 1월, 당시 천왕사의 주지스님이 꿈에 계시를 받아 진주 비봉산자락에서 머리부분을 찾고, 버려진 몸통은 그해 5월 지리산통신골에서 발견되었다. 스님께서 정성을 다하여 원형대로 봉합한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성모상은 현재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785번지 ‘천왕사’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다.
높이 약 1.2m, 너비 50cm의 단아한 모습,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은 자세는 엄격한 어머니의 기품이 배어난다.

기록에만 근거하더라도, 천 년 세월을 천왕봉에서 민중들의 소망과 함께해온 성모상. 그것은 어떠한 이념과 종교도 초월하는 겨레의 상징물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너무 많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물질만이, 서구적인 가치만이, 발전된 과학기술만이, 우리가 지향하는 유토피아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분열로 어지러운 시대, 왕조와 정권을 뛰어넘어 천년세월 지리산을 지키고 민중의 소망과 함께해온 천왕봉의 성모상이 한없이 그립기만 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2006년 8월 30일자 경남일보 칼럼>

지난 1973년 8월 초순 까지만 해도 천왕봉 서쪽 1.5미터가량 떨어진 바위에는 합장하고 있는 높이 1미터의 성모상과 그 오른편에 높이 1,1미터 가량의 여신상을 새겨놓은 바위가 나란히 서 있었다

 

 

     

 

 

▲1959년 천왕봉에 있던 성모석상과 마애불(<김결렬>님 사진)

 

 


 

 

 

 



▲1962년 천왕봉 산막의 <김순용>영감님과 성모석상과 마애불


▲1973년도 사진 (<조박사>님 제공 <김결렬>님 사진)


가부좌를 한 듯 다소곳이 앉아 합장을 하고 있는 자그마한 석상으로몸집에 비해 유별나게 얼굴이 크지만 어머니같이 할머니같이 포근하고 인자한 얼굴이다. 움푹 들어간 눈이 매혹적이고 햇볕에 눈이 시린 듯 눈가에 웃음이 배어 있다. 오뚝한 콧날 오므리고 있는 작은 입 언저리에도 미소가 흐른다. 쑥색 바탕에 흰 점이 박힌 이 석상의 석질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석이다. 돌 전문가들은 천축 땅의 것이라고도 하고 파미르고원 것이라고도 했다

천 년 전 신라 때부터 세워져 있었다는 [성모석상]은 신라 때는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고려 대에서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름이 다르게 불려 오면서 민초들과 무속인들의 기복신앙 상으로 숭상 되어져왔다

그런데 천년 동안 천왕봉을 지켜온 성모석상의 증발과 수난은 고려시대 이후로 근세에까지 한 두 번이아니다. 첫 번째 수난은 역사 이래로 우리 민족에게는 만년 원수였던 왜인에 의해서였다.

고려 우왕 6년 (1380) 왜구들의 대군이 쳐들어 왔다가 인월에서 <이성계>에게 대패하고 지리산으로 도망했던 패잔병들이 분풀이로 천왕봉의 [성모석상]에 칼질을 내서 이마가 쪼개어져 나중에 사람이 알맞게 붙였다 한다.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에서-

두 번째는 불가의 한 스님에 의해서봉변을 당해야 했다

조선 선조때 인근의 백성들이 무당의 유혹에 의하여 생업을 작폐하고 오직 성모석상을 찾아 기복을 올리는 사람들이 천왕봉에 구름같이 모여들어
천하의 명산 지리산을 더럽히는 관계로 나라에서 걱정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날 신장이 8척인 <천연>이라는 중이 지리산에 왔다가 천왕봉 음사가 영괴하여 지나는 사람이 기도를 하지 않으면 몇 걸음 못가서 인마 모두 죽는다 하여 이곳을 지나는 데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즉시로 천왕봉에 들러 성모사당을 부수고 신상을 불태우고 [성모석상]을 던졌다고 한다.
그때 <천연>의 행동에 대해 불가에서는 물론 많은 유생들은 칭찬을 하였고, 특히 <남명>선생과 <퇴계>선생은 성모석상을 부순 <천연>의 용감한 행동을 찬하는 헌시까지 보냈다고 한다.

-정홍명의 “기옹만필”에서-

이러한 소동에도 [성모석상]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세 번째 수난은 1945년 11월 어느 날 [성모석상]이 삼장면 내원리의 한 농부에 의해 짚가마니와 새끼줄에 묶여서 산 아래로끌어내려지게 되었다
[성모석상]을 보쌈형태로 끌어내려 자기 집에 보관하던 중 성모상을 찾아 나선 사람들에 의해 발견이 되었을 때, 그 농부는 꿈에 성모님이 나타나서 제발 옮겨 달라고 간청을 하기에 그랬다고 했다고 한다.

-김경렬저 ‘지리산다큐멘타리“ 에서-

그 후 좌측에 나란히 앉아 있던 마애불여신상과 함께 [성모석상]이 1973년 8월경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이번이 네 번째로 당한 수난이다.

성모석상]이 하루아침에 없어지자 뜻있는 지역민들이 주변에서 찾아 헤매었으나 이 석상을 본 사람은 없었다.미신의 본거지라고해서 어느 뜻있는 단체에서 계획적으로 도륙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들 석조물들이 없어진 것은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다.

일각에서는 마침 그 시절에 정부에서 전국의 무당집이나 서낭당 산신각 등의 일체 철거령이 내려졌던 때라 [성모석상]의 증발은 어쩌면 관에서 행하여진 것인지도 모른다고도 한다.

저토록 인자한 얼굴의 [성모석상]이 왜 수난을 당해야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토록 여러 번 수난을 당하고 증발 했었던 [성모석상]이 지금은 지리산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지난 1987년 1월17일 천왕사의 주지 스님이 꿈의 계시를 받고 진주 비봉산의 어느 과수원 장작더미 밑에서 머리부분을 찾았다고 한다.
오른쪽 어깨 밑으로 잘려진 몸통은 그해 5월 14일 어느 주민의 귀띔으로 지리산 통신골에서 찾아 원형대로 복원 했다. 지금의 자리에 모신 성모상이 16일 만에 또 없어졌으나 주지스님의 간절한 기도 끝에 선몽을 받아 그해 7월17일 절 앞쪽 대나무 숲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한때는 지역 주민들이 [성모석상]이 돌아오면 위리안치 시키려고 천왕봉에 쇠창살집까지 준비하고 있었으나 천왕사측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은 법정까지 가기도 했다.

중산리에 또 다른 [성모석상]이 만들어진 것을 보니 아마도 법정싸움에서 지역민들이 패한듯하다.

[성모석상]의 주인은 엄연히 지리산 천왕봉인데 주운 물건은 마땅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할 텐데...!


 

 



▲ 같은 성모상이지만 천왕사의 성모상과 산청군청에서 만든 성모상의 느낌은 다르다

군청에서 만든 성모상을 크고 견고하지만 천왕사의 성모상은 작고 아담하며 자연미가 흐르고 머리에 칼자국으로 역사의 아픔을 느껴서인지 더욱 친근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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