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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 산행후기 ³°″/일상이야기

나 태어난 곳 치악산 강림『태종대』를 조명하다

 

 

 

△ 태종대 비각

 

 

태종 이방원의 스승인 운곡 원천석 일화가 남아있는 태종대

 

강원문화재 제16호 (1984년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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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대의 대하여 ♧

 

 

태종대는 깅림면 치악산 국립공원 매표소 바로 위에 위치한 곳으로

태종 이방원과 스승이었던 운곡 원천석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고려 말 4처사의 한 사람이었던 운곡 원천석은 조선조 태조인 아방원의 스승이었다.

운곡은 태조가 고려를 전복시키고 조선을 세우고 또한 그의 아들들의 피비린내 나는

왕권다툼에 실망과 분노를 느낀 나머지 모든 관직을 거부하고 개성을 떠나 이곳 강림리에 은거하고 있었다.

 

험한 산골이었던 이곳에 방원이 임금으로 등극하기전인 1415년 옛스승인

운곡을 찾아 다시 관직에 앉히고 정사를 의논하고자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강작하고 절개가 곧았던 운곡은 방원과의 만남을 꺼려

일부러 치악산 골짝기로 몸을 숨겨 만나주지 않았다.

 

방원이 자기를 찾는다는 것을 안 운곡은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는 노파에게

자신을 찾는 사람이 오거든 횡지암 쪽으로 자신이 갔다고 일러 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는

운곡은 반대 방향으로 피신했다.

 

방원은 노파가 가르쳐주는 곳으로 스승인 운곡을 찾았으나 끝내 운곡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당시 방원이 머물 던 곳을 ‘주필대’ 라고 불러오다가 나중 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하자 ‘태종대’로 부르게 되었다.
나중에 태종이 임금이 되어 다시 운곡을 부르자 차마 어명을 어길 수 없던 그는
상주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는 대궐에 들어가 태종의 형제간 살육의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해
무언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임금인 줄 모르고 거짓을 아뢰었다가 나중에 그 분이 지엄하신 임금이라는
사실을 알 게 된 노파는 죄책감에 자신이 빨래하던 바위 아래 소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이 노파가 빠져 죽은 소를 사람들은 ‘노고소’라 불렀으며
이곳 마을에서는 매년 이 노파에 대한 제를 올렸다고 한다.

부근에는 방원이 만나지 못한 스승을 향해 돌아가면서 예를 갖춰 절을 했다는
‘배향산’이 있고 임금님의 수레가 넘었다는 ‘수레넘이’ 고개가 부근에 있다.

그리고 치악산 비로봉 동남쪽 300m 아래 운곡이 머물렀던 ‘변암’이 있고 그 당시 대쪽같던 운곡의 굳은 절개를, 오늘의 우리들에게 이야기 해 주고 있다.

 

 

 

 

 

 

 

△ 태종대와 강림천



치악산 비로봉해발1,288m 가래골과 황지암골,
향로봉 해발1,043m 향로봉에서 곧은치골과 산성골 등
많은 지류들이 모여발원하는 맑은계곡수가 부곡저수지에 흘러들어
하류인 강림천으로 이루어 주천강으로 합수 된다.

아름다운 강림천 수직바위에 태종대 비각이 위치하고 있으며.
비각 바위 위에 서면 옥같이 흐르는 아름다운 강림천과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단풍이 물든 치악산 태종대의 비경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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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로 접어드는 첫날

동생은 서울에서 나는 울산에서 자가 운전으로 원주로 달린다

매년 엄니아부지 묘소 벌초와 고향을 둘러보기 위해서...!
아니...마음이 내키면 언제든 찾아 가는 곳이다.

고향 산천의 산행도 하고.또는 그냥 엄니아부지 잠들어 계신 곳이기에
언제든 차를 달려 찾을 수 있는 고향이 좋아서이다.

울산에서 출발하면 휴게소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원주까지
정확하게 3시간20분이 소요 된다.

이번에는 휴게소에서 아침먹고, 동생과 시간을 맞추려고 약40분을 빈둥대며
4시간이 지나 엄니아부지 묘소에 도착하여 깔끔하게 벌초 마치고
5살까지 살았던 나 태어난 곳...강림 엄니아부지 삶의 터전이었던 산지(땅)을 둘러 보았다

그러나 현재 모두 치악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숙제이긴 하다.

 

태종의 수레길을 복원/개발 한다고 하는데 

터가 그길에 위치하여 있는데...향후 어떻게 될지 의문이다.

 

 

 

 

 

 

 

△ 태종대 돌계단

 


지금까지 치악산이 휘 감아 첩첩 산간오지로 남아있던 강림 부곡리는
현재, 영동고속도로 새말IC에서 진입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중앙고속도록 신림IC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어느쪽에서 접근하더라도 주천강을 따라 강림리에 진입하는 도로 주변은
환상적인 풍광을 즐기며 드라이브할 수 있는 비경 길이 이어지며
그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면 강림리에 들어서는 시간은
새말IC든 신림IC든 1시간 내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중간 중간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차를 세운다면
조금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릴적, 고향 강림에서 원주를 오가노라면, 거친 비포장 길로
수많은 고개를 넘고 넘어, 온종일 시외버스에서 멀미로 비닐봉투와
사투를 벌여야 했던 그런 기억이 새삼스럽다

동생과 오랜만에 찾아 보는 고향땅 강림...!
잘 포장되어 있는 도로 드라이브 길은 비단길처럼 부드럽게 느껴지고
아직 잘 보존되어 있는 나 태어난 곳 강림은 언제나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뜻하게 느껴진다.

 

 

 

 

 

 

 

♧ 비로봉에서 띄운 편지

 

 

새벽 하늘 채 열리지않은 검은 하늘, 울산!
먼 추억으로 들어가 떠 올리는 고향 하늘까지 한숨에 달린다.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떠나는 여정, 그 그리움 설레이며...

희뿌연 연무 속 고요한 고향 하늘...
내 살던 관설동 지나 부모님 잠들어 계신 백운산 자락 스치는 차창 밖
행여 고향 산정 오르면 그 자락 볼 수 있으려나

한걸음 한걸음 숨가쁜 거친 호흡 토해 오른 비로봉 산정
몽환적 짙은 박무는 순간, 혼 빼듯 몽롱하게 새겨진 머리속 그림으로 펼쳐지고
엄니 아부지 잠들어 계신 백운산 자락, 고개 쑥 빼 내려 본다

치악이 가록막힌, 나 태어난 강림과 내 살던 관설동...
내가 선 비로봉 정상서 고개만 돌리면 두곳 내려다 보이는 뛰는 나의 심장 인 곳
조 아래 내려다 보이는 화전 일구던 치악 기슭 시선 멈춘다

치악 곧은치 넘나들던 엄니 아부지의 젊은 힘찬 발걸음 보이는 듯
지금 그 곧은치를 사이에 두고 산과 함께 잠들어 계시는 엄니 아부지그림자 따라
잿빛 몽환 속 시선 오가며, 그 고갯길 곧은치 넘어 안부 인사 올리네

바쁜 세월 시간 속 모른 채 하고, 있던 나의 고향 산하 하늘
내 어찌 꿈에도 잊을 수 있다 말 할 수 있을까
그 평온함 속, 진한 그리움 묻어 두고 내려서는 비로봉

내 영혼, 반을 남겨두고 떠나오며
내 늙어 힘 없기 전, 엄니 아부지 남겨주신 나무 우거진 그 집터에
통나무 집 작게 지어 고향 벗하며...

어린 꿈, 묻 길...!


                                        -비로봉에서(2010년 1월10일)...조릿대-

 

 

 

 

 

 

☆ 강림에 대하여...☆



본래 원주군 수주면의 지역으로서, 각림사(覺林寺)가 있었으므로 "각림"이라 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영월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페합에 따라, 가천,노평,

노구소,노뜰,보건너,선계,창말,수레너미를 병합하여 강림리(講林里)라 하였다.

 

1963년 1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주면에서 횡성군 안흥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989년 4월 횡성군 조례에 의거 안흥면 강림출장소가 강림면으로 승격함에 따라

강림면에 편입되어 현재의 1∼5리로 분리되어 있다.

 

 

 

 

 

 

△ 태종대 비각

 

 

 

 

 

△ 태종대 아래 강림천

 

 

 

 

 

△ 태종대 [주필대] 비


 

 

 

 

☆ 운곡 원천석 선생이 은둔하였다는 변암 ☆



변암 안쪽 벽면에는‘변암(弁岩)’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옆으로는 ‘太宗?東二十里’라는 문구가 있다.

또 바깥 벽면에는 ‘開穿石井常?湯 收拾山蔬且慰貧’이라는 시구(詩句)가 있고,
옆쪽 바위 아래면에도 ‘耘谷元先生諱天錫麗末隱居此山下我太宗以甘盤舊恩累召不
至幸其盧先生避入于此崇禎後八十年癸卯後孫尙中識不?上高其義’라고 새겨져 있다.

 

 

 

 

 

 

△ 변암



운곡 원천석 선생이 은둔생활을 하였다고 전하는 굴바위이다.

치악산 비로봉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300m쯤 아래에위치하고 있으며,
생긴 모습이 고깔처럼 생겼다고 하여 ‘변암(弁岩)’이라 불린다.
바위 아래에는 수십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으며,
그 옆에는바위 아래에서 나는 샘이 있다.

원천석 선생은 이곳에 온돌을 만들고
산나물과 열매로 끼니를 대신하였다고 전해진다.

 

 

 

 

 

 

 

△ 변암에 새겨진 글귀

 

 

변암 위치는 비로봉 정상 남쪽 300m에 위치하고 있다.


 

 

 

 

 

 

△ 변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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