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 홀로 선 정상석 보기 어려운데, 절묘한 "순간포착" 순간
지리산은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을 주봉으로 하는 지리산은 서쪽 끝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51m) 등 3봉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100여 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이룬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리웠고, "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리산은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 되었다.
"한국"인의 기상,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경남"인~이었는데, 어느 누군가에게 훼손되고, 결국 "한국"인으로 화합되어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로 현재까지 온전하게 이어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 천왕봉은 곧 천주(天柱)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
↑ 기대치 않았던 조망, 개선문 지나 장터목 너머 조망되는 이쁜 엉댕이 반야, 그리고 노고단까지 조망
↑ 축하 축카~짱의 지리 천왕봉 초등
천왕봉에서 목소리 높히고 "내 카메라에 찍히면 3대가 재수 없으니 모두 비켜주시오" 하여 천왕봉 정상석 인증샷을 남겨 보았다.
긴줄 서 기다리는 많은 님들, 모두가 넉넉한 지리산 같은 마음, 웃으며 멀지감치 비켜주셔 감사히 담아 왔다.
↑ 천왕봉 정상 (동봉)
↑ 천주에서 반야봉 중심으로 좌)노고단 우)만복대 조망
↑ 제석봉 향하며 고사목 지대
↑ 법천폭포, 수량적어 웅장함 부족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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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 동부지도
* 산이름: 지리산 천왕봉
* 산행지: 경남 산청군 시천면/ 함양군 마천면 * 코 스: 중산리(셔틀버스:10:00) → 순두류 → 로타리대피소 → 법계사 → 천왕봉 → 제석봉 → 장터목 → 칼바위골 유암폭포 → 법천폭포 → 칼바위 → 중산리(18:00) [산행종료] 산행시간 7시간 30분 소요 (짱에게 지리산 소개, 알탕 등 시간 의미 없음) * 일 시: 2016년6월 18일(토) * 날 씨: 맑음 * 일 행: 조릿대 & 짱 * 이 동: [출발/울산 (06:30) → 중산리 (09:40) 법계사 셔틀버스 (10:00) [귀울/중산리 (18:30) → 단천 (지리산우렁쌈밥집 석식) → 울산도착 House (22:30) * 교 통: 자가운전 (왕복:43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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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짱의 지리산 초등기, 천왕봉 이모저모 ♧
지리산 천왕봉 오르기, 참 오랜만에 드는 지리, 짱과 함께라 착한 길로 오르 내린 천왕봉, 6개월여 그리워해 온 지리라 설레임으로 차를 달린다. 또한, 짱은 태생 후 지리산 천왕봉을 처음 오르는 초등이기에 더욱 의미있었던 산행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천왕봉에 올라서도, 하산해서도 짱에게 그 감정을 묻지 않았다. 그 느낌과 감정은 짱에게 큰 의미로 남겨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1986년 젊은 시절 지리산를 가기 위해 무던히도 체력단련해서, 87년 첫 지리 초등으로 종주할 때 나의 기분과 같으려나, 하지만 그때 감정과 느낌이 생각이 잘 나지 않으니, 다만 태풍 셀마로 3일 합 5일 동안 고립되었다 살아 돌아 온 기억 뿐이다.
집나간지 일주일 넘어 귀울하니, 엄니 하시는 말씀..."왔나" ? 였다. 휴대전화도 구조대도 없었던 시절, 생존 게임이었다.
오랜만에 든 지리, 가장 대중적인 길로 오르 내린 천왕봉, 또 한 추억으로 남겨 본다.
↑ 중산리 두루동 향하며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곳 멈추어, 박무 가득해 어두운 천왕봉을 짱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 살짝 당겨서 본 천왕봉
↑ 남명 조식 선생의 시 한수에 심장이 멋는 듯 하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회야 무릉이 어드뇨 나는 옌가 하노라
-남명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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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두류까지 운행되는 법계사 셔틀버스로 순두류 당도하여 산행을 시작하였다.
자율적으로 내던 차비는 이제 어른2000원 학생1000원이다.
↑ 순듀류 위령비 산행시작
↑ 순두류에서 법계사길 생태탐방로라 명 되어 있다.
↑ 이 출렁다리 건너면 우측골이 중봉골, 하지만 오늘은 착한길로 향한다.
↑ 이 광덕교 건너면 우측골 광덕사지와 법주굴로 갈수 있는데, 유혹에 인내하다.
↑ 땀 뻘뻘 흘리며 돌계단길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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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끌요란한 로타리대피소는 패스, 바로 법계사 향했다.
↑ 법계사 앞 샘터, 목 축이고, 쉬지 않고 오르는 버릇이 있는 짱 지리라 불러 세워야 할 판이다.
↑ 법계사 일주문
법계사는 지리산 천왕봉 동쪽 중턱에 자리잡은 법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가 세운 절이라 전한다.
해발 1450m로, 반야봉 묘향암 해발 1500m 다음으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화재로 토굴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최근에 법당을 지으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 법계사 삼층석탑
↑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
이 탑은 바위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몸돌 각 모서리에는 기둥을 넓게 새겼다.
각 층의 지붕돌은 두터운 편이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장식 부분에는 포탄 모양의 돌이 얹혀있는데, 나중에 보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바위를 기단(基壇)으로 이용한 탑은 신라 이후로 유행하였는데,
이 탑처럼 아래 기단부를 간략하게 처리한 경우는 드물다.
양식이 간략화되고 투박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전형적인 신라석탑 양식에서 벗어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 법계사에서 건너다 보이는 문창대
↑ 당겨서 본 문창대, 문창대가 이곳이다 저곳이다 여러 설이 있지만, 필자는 이곳이 문창대로 믿고 있다.
↑ 법계사 혈맥을 끊은 쇠말뚝을 제거하여 이렇게 전시해 놓고 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는 썩을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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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계사 돌아 나와, 본격적인 오르막 천왕봉 올라야 한다.
↑ 문창대라는 또 다른 바위에서 바라 본 문창대
↑ 살짝 당겨서 본 문창대
↑ 어~라...지리 들때까지도 조망이 영 아니었는데, 저 건너 삼신봉이 선명하게 조망된다.
↑ 일출봉과 시루봉, 촛대봉은 아직
↑ 개선문 도착
과거 "하늘 문을 여는곳"이라 하여 "개천문"이라 했는데, 지금은 "개선문"이라 한다.
↑ 천왕봉이 지척으로 올려다 보이는 곳, 많은 산님들 올라 있다.
↑ 천왕남릉
↑ 아~싸...반야와 노고단...기대하지 못했는데 조망이 좋아졌다.
↑ 좌측 끝부터 시루봉, 촛대봉, 앞 바위 거친 곳 일출봉, 그 우측 뽀족한 바위 연하봉, 멀리 반야봉과 좌측 노고단
↑ 장터목 너머로 반야야 노고단
↑ 천왕봉 오르며 다시 돌아 본 주능
↑ 누구든 이쯤에서 한번 쉬어 가는데, 짱은 그냥 내 달린다.
↑ 살짝 당겨서 본 천왕봉
↑ 천왕봉 오르기 막판
↑ 천왕봉 동봉
↑ 천왕봉 도착
↑ 천왕봉 정상석 차지하기
"내 카메라에 찍히면 3대가 재수 없으니 모두 비키시오"를 몆번 외치니, 모두들 비켜 주셔 감사함이다.
↑ 짱~천왕봉 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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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음 것 느껴보라 한참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 천왕봉에서...!
평소 산행 때, 사진 찍히기 좋아라 하지 않는데, 오늘은 이렇게 담아 달라 요구하는 짱 !
아마도, 이 사진 한장에 모든 감정 표출 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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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열심히 지리를 설명하였다.
↑ 저기가 중봉, 뒤로 하봉과 영랑대 그 옆으로 두류능선이라 설명
↑ 저 아래가 지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 칠선골이라고, 건너편 산은 지리산 전망대 삼봉산이라고...
↑ 그리고 주능 설명
저 엉덩이 같은 곳이 반야봉이고 그 왼쪽이 노고단, 반야봉 오른쪽은 지리 서북릉 만복대라 설명 하였다.
↑ 다시, 초암릉과 두류능선 설명
↑ 거친 남릉 뒤로, 촛대봉과 시루봉,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큰산은 광양 백운산이라고 말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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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렵다 제지하는 짱~더이상 침묵해야 했다.
그리고 천왕봉 아래 아늑한 곳에서 오찬 시간을 즐겼다.
↑ 줄이고 줄여서, 이제 큰손 어느정도 작아져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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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롭게 오찬을 마치고, 출발 준비하고
↑ 뭔가 놓고 오는 느낌, 해서 다시 중봉 하봉 함 째려보고 출발
↑ 돌아 본 천왕봉 정상석은 아직도 바쁘시다.
↑ 천왕 남릉도 한번 더 째려 보고...호시탐탐 기회 보아야 할 판
↑ 다시 상봉
↑ 남릉과 통신골도 기웃거려 보고...
↑ 오찬 즐기고 나니, 조망 흐려져 있다.
↑ 촛대봉도 흐림
↑ 통천문 가는 길, 올라오는 산님들 너무 힘들어 하여 계속 응원의 말 잊지 않는 짱 !
↑ 통천문 내려서는 길, 분위기 다른 고사목을 유심히 바라보는 짱
↑ 내려다 보이는 제석봉
↑ 통천문 통과
↑ 통신골 좌) 날머리 기암
↑ 천왕봉 바라보기
↑ 일출봉과 촛대봉
↑ 살짝 당겨서 일출봉과 촛대봉
↑ 제석봉 고사목단지
이제 제목 달리 해야 할 듯, 열 손가락으로도 고사목 꼽을 수 있겠다.
자연의 순리 자정치유 능력은 역시 위대함이다.
↑ 지리 주능은 춤 추는 듯 이어지고...
↑ 힘겹게 남아 있는 고사목은 올 태풍에 잘 버틸수 있을런지...
↑ 장터목대피소 당도 하고...
↑ 정겨운 것은 이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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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주능,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하산 길 접어 들었다.
↑ 시야 트이는 통신골 초입에서 올려다 본 천왕봉
↑ 유암폭포 도착, 헐~좀 안보이는데서 하지, 참 이런것 불만이다.
더이상 있으면 육두문자 나올 듯, 그냥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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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바위골 수량 빈약하고...
↑ 돌탑지대 도착
↑ 짱도 어렵사리 큰돌 구해와 5층 석탑 올린다.
↑ 헐~그러고 보니,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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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암폭포가 아쉬워, 슬며시 법천폭포에 들어 섰다.
↑ 법천폭포 도착
↑ 법천폭포에서...
↑ 법천폭포 나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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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들어 올 산님 있을까, 법천폭포 좀 아래 내려서 종일 달아 오른 몸 푹~ 담구워 식힌다.
↑ 남은 2km 마저 하산, 칼바위 도착
↑ 하산완료...허리 좋지 않음에도 끝까지 내색 않는 짱~수고 했어요^^
↑ 산이 좋아 산에서 살다 산으로 간 우천 허만수 선생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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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송한 옷 갈아 입고, 천왕봉 주인 만나러 천왕사에 들렀다.
↑ 천왕사
↑ 천왕사에 모셔져 있는 성모석상
천왕봉 정상에는 천년세월을 지켜온 ‘성모석상’ 이 있었다.
이 땅의 민중들은 현실사회의 질곡과 고통을 지리산의 신령님께 빌고 또 빌며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왔다.
성모상은 한낱 돌덩이에 불과하지만 민중들의 삶의 애환과 인간사의 선악을 파악하고 있었을 터이다.
숱한 사람들에게 황홀한 기원의 기쁨을 안겨주는 역할도 했다.
가부좌를 한 듯 다소곳이 앉아 합장을 하고 있는 자그마한 석상으로 몸집에 비해 유별나게 얼굴이 크지만
어머니 같이 할머니 같이 포근하고 인자한 얼굴이다.
움푹 들어간 눈이 매혹적이고 햇볕에 눈이 시린 듯 눈가에 웃음이 배어 있다.
오뚝한 콧날 오므리고 있는 작은 입 언저리에도 미소가 흐른다.
쑥색 바탕에 흰 점이 박힌 이 석상의 석질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석이다.
돌 전문가들은 천축 땅의 것이라고도 하고 파미르고원 것이라고도 했다.
천 년 전 신라 때부터 세워져 있었다는 [성모석상]은 신라 때는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고려 대에서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름이 다르게 불려 오면서 민초들과 무속인들의 기복신앙 상으로 숭상 되어져왔다.
그런데 천년 동안 천왕봉을 지켜온 성모석상의 증발과 수난은 고려시대 이후로 근세에까지 한 두 번이아니다.
↑1962년
첫 번째 수난은 역사 이래로 우리 민족에게는 만년 원수였던 왜인에 의해서였다.
고려 우왕 6년 (1380) 왜구들의 대군이 쳐들어 왔다가 인월에서 <이성계>에게 대패하고 지리산으로 도망했던 패잔병들이
분풀이로 천왕봉의 [성모석상]에 칼질을 내서 이마가 쪼개어져 나중에 사람이 알맞게 붙였다 한다.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에서-
두 번째는 불가의 한 스님에 의해서봉변을 당해야 했다.
조선 선조때 인근의 백성들이 무당의 유혹에 의하여 생업을 작폐하고 오직 성모석상을 찾아 기복을 올리는 사람들이 천왕봉에 구름같이 모여들어 천하의 명산 지리산을 더럽히는 관계로 나라에서 걱정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날 신장이 8척인 <천연>이라는 중이 지리산에 왔다가 천왕봉 음사가 영괴하여 지나는 사람이 기도를 하지 않으면 몇 걸음 못가서 인마 모두 죽는다 하여 이곳을 지나는 데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즉시로 천왕봉에 들러 성모사당을 부수고 신상을 불태우고 [성모석상]을 던졌다고 한다.
그때 <천연>의 행동에 대해 불가에서는 물론 많은 유생들은 칭찬을 하였고, 특히 <남명>선생과 <퇴계>선생은 성모석상을 부순 <천연>의 용감한 행동을 찬하는 헌시까지 보냈다고 한다.
-정홍명의 “기옹만필”에서-
이러한 소동에도 [성모석상]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세 번째 수난은 1945년 11월 어느 날 [성모석상]이 삼장면 내원리의 한 농부에 의해 짚가마니와 새끼줄에 묶여서 산 아래로 끌어내려지게 되었다. [성모석상]을 보쌈형태로 끌어내려 자기 집에 보관하던 중 성모상을 찾아 나선 사람들에 의해 발견이 되었을 때, 그 농부는 꿈에 성모님이 나타나서 제발 옮겨 달라고 간청을 하기에 그랬다고 했다고 한다.
-김경렬저 ‘지리산다큐멘타리“ 에서-
그 후 좌측에 나란히 앉아 있던 마애불여신상과 함께 [성모석상]이 1973년 8월경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이번이 네 번째로 당한 수난이다. 성모석상]이 하루아침에 없어지자 뜻있는 지역민들이 주변에서 찾아 헤매었으나 이 석상을 본 사람은 없었다. 미신의 본거지라고해서 어느 뜻있는 단체에서 계획적으로 도륙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들 석조물들이 없어진 것은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다.
일각에서는 마침 그 시절에 정부에서 전국의 무당집이나 서낭당 산신각 등의 일체 철거령이 내려졌던 때라 [성모석상]의 증발은 어쩌면 관에서 행하여진 것인지도 모른다고도 한다.
저토록 인자한 얼굴의 [성모석상]이 왜 수난을 당해야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토록 여러 번 수난을 당하고 증발 했었던 [성모석상]이 지금은 지리산 천왕사에 모셔져 있다.
지난 1987년 1월17일 천왕사의 주지 스님이 꿈의 계시를 받고 진주 비봉산의 어느 과수원 장작더미 밑에서 머리부분을 찾았다고 한다.
오른쪽 어깨 밑으로 잘려진 몸통은 그해 5월 14일 어느 주민의 귀띔으로 지리산 통신골에서 찾아 원형대로 복원 했다.
지금의 자리에 모신 성모상이 16일 만에 또 없어졌으나 주지스님의 간절한 기도 끝에 선몽을 받아 그해 7월17일 절 앞쪽 대나무 숲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한때는 지역 주민들이 [성모석상]이 돌아오면 위리안치 시키려고 천왕봉에 쇠창살집까지 준비하고 있었으나 천왕사측의 완강한 반대로 결국은 법정까지 가기도 했다.
중산리에 또 다른 [성모석상]이 만들어진 것을 보니 아마도 법정싸움에서 지역민들이 패한듯하다.
[성모석상]의 주인은 엄연히 지리산 천왕봉인데, 주운 물건은 마땅히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할 일이 당연한 일인데, 한 개인의 영리에 이용되는 것이 안타까움이다.
▒ ▒ ▒ ▒
지리산, 묘하게 앉겨 있으면서도, 그리운 지리...품 !
짱과 함께여서 힐~링...가득 앉고 돌아 온...고마운 지리산 입니다.
"어리석음도, 머물면 지혜로워진다"는 지리, 늘~ "지리"를 꿈 꾸는 나 !
단성, 지리산우렁집까지 들러 옵니다.
▒ ▒ ▒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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