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전,후 신불산 빨치산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부산을 점령하라’는 뜻을 가진 남도부(南到釜, 본명 하준수)였다. 남도부는 1950년 6월 24일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원 300여 명을 이끌고 남하한다. 그는 전투를 계속하며 7월 경북 청도군 운문산에 도착한다. 병력은 130여 명으로 줄었다. 처음에는 주암계곡에, 나중에 681고지인 태봉산에 사령부를 두고 빨치산을 지휘했다. 지리산과 마찬가지로 영남알프스는 1천 미터 이상의 험준한 산세와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었기에 유격활동으로, 무엇보다 부산 경남 일대의 후방을 교란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신불산 빨치산 지휘소 표지석이 이렇게 파괴되었던 것조차 5월에 사라지고 없다.
홍길동 부대는 두서면 아미산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남도부 사령부가 있었던 갈산고지로 가는 길은 베네치아 산장의 인공폭포 오른쪽 펜션 뒤로 난 길에서 시작한다. 길의 처음은 가파르다. 산이 가파를수록 숨이 찬 것은 당연하다. 밧줄로 부여잡고 걷는 길이다. 숨이 벅차오름과 길의 경사는 비례한다. 10여 분 걷다 보면 배내고개를 조망하는 곳이 나온다. 올라오는 길목을 지키는 곳인지 참호가 있다. 배내를 오가는 사람이 보이는 곳에 있다. 길은 다시 완만하다 다시 가파르기를 반복한다. 가파르게 오르는 길목에는 어김없이 참호가 있다.
백 년을 넘음 직한 소나무가 서서히 죽고 있다. 소나무 위에 오르면 태봉마을을 비롯하여 배내골을 오가는 토벌대를 관측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걷는 길이라 산길은 밋밋하나 좌우는 가파르다. 1시간 정도 걷고 나면 빨치산의 지휘소가 나타난다. 다소 평탄하다. 반월형으로 산허리를 따라 참호가 파여 있지만 지금은 낙엽의 무덤이 되었다. 그곳에서는 당 지휘부와 전투 사령부가 거리를 두고 생활했었다. 지휘부가 있었던 장소에 주먹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가진 소나무가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곳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곳 바위 아래에 큰 참호가 있고, 또 그 아래로 옹달샘이 있어 기본적 식수를 확보할 수 있다.
다시 걸음을 옮겨 태봉산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에는 3층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표지석이 3월까지만 해도 부서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마저 사라지고 없다. 전망대에서 1km 정도 걸으면 파래소폭포가 나온다. 15미터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청아한 소리는 더위를 씻어낸다. 이곳은 빨치산들의 취사장이었다. 그리고 여름날은 목욕 장소가 아니었을까. 전투의 긴장 속에서 그들도 어린아이처럼 환한 웃음 지었을 것이다. 지금은 관광객들의 소리 가득하다.
신불산 빨치산은 북에서 내려온 유격대원을 중심으로 그 후 지방당원을 받아들여 최고 220여 명에 이르게 된다. 군경과의 교전 700여 회, 군경 사살 1800여 명, 각종 무기 약탈 800여 정, 각종 실탄 약탈 2만여 발, 민가 방화 100여 호, 민가 습격 500여 호, 군용열차 전복 20여 차량, 군용트럭 소각 또는 파괴가 200여 대에 달하는 등 후방 교란 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남도부의 전투지역은 전쟁 기간 동안 한 번도 인민군에게 점령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적진 한 가운데에서 고립적인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으로 어떤 연락을 해본 적도 없었고, 보고와 지령 그리고 전투장비와 물자의 보급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정규군인 빨치산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총과 탄약은 전투를 통해 노획 가능했지만, 식량은 결국 지역 주민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보급투쟁에는 부대원 60~70명과 당원 20~30명이 동원되기도 했다. 밀양 재약산에 많을 때는 소 32마리를 방목하고, 하루에 2마리를 잡은 적도 있었다. 쌀밥 대신 소고기로 배불리 먹기도 했다. 전투부대들은 교대로 영양보충을 하며 돌아갔다. 하지만 빨치산이 보급투쟁을 하며 지역민에게 주었던 ‘원호증’은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 매일 100여 명이 먹을 식량을 확보한다는 것은 빨치산이나 지역민에게는 엄청난 고역일 수밖에 없다. 당시 지역주민 200여 명이 살상 내지 피해를 입었다.

빨치산 지휘소가 있던 곳에 세워진 전망대. 갈산고지는 빨치산 중화기 소대장 우종대의 별칭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 12월부터 토벌활동이 시작됐다. 언양·삼남·상북 주민을 동원하여 하룻밤 부역으로 미군 비행장을 닦고 정찰기를 띄우기도 했다. 비행기는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산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사자벌에서는 대포를 쏘았다. 1951년 겨울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서자 신불산에 1만 명을 투입하여 토벌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52년 2월과 3월의 신불산 공비 토벌작전과, 6월의 아미산 작전으로 빨치산은 소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각 산간 오지마을을 소개시켜 빨치산의 보급투쟁을 막았다. 토벌대의 공격 등으로 소위 총에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어 1953년 겨울 대원 수는 37명으로 격감하였다. 결국 남도부는 하산을 결정하게 된다.
빨치산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지휘부는 휴전 이후 당의 지령에 따라 하산하여 도시에 잠입하여 지구당 구축을 하려다 남도부처럼 검거되어 사형을 당했다. 검거된 일부는 혹독한 전향공작으로 죽기도 했지만, 일부는 형기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하였고, 또 일부는 북한으로 넘어갔다.

주암계곡은 남도부 부대가 처음 지휘소로 삼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1951년 12월 토벌대는 빨치산들이 소를 잡고 국솥을 걸었던 흔적을 발견했다.
신불산 빨치산 중에서 양산시 하북면 출신의 구연철은 자신의 빨치산 경험을 책으로 출판하였고, 또 김정일의 처남으로 알려진 남도부의 연락병인 차진철(본명 성일기)은 그의 뛰어나 기억력으로 신불산 빨치산 역사를 복원하였다. 남도부의 직속부대 대장인 추일(秋一, 본명 김형식)은 서울대 법대에서 럭비부 주장을 맡을 만큼 리더십도 갖췄었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월북 후 강동정치학원과 2군관학교에서 유격 전문요원으로 양성된 후 남도부와 같이 신불산으로 왔다. 1952년 검거되어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독립운동을 한 조부와 부친 덕택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20년간 장기수로 복역한 뒤 출옥해 1980년대 고향에 정착한 후 빨치산 화가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1952년 『신천지』에 실린 소설가 박영준의 단편소설 「빨치산」의 모델이다. 한편 양산 출신의 석용화는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에 실망하여 좌익 운동에 뛰어든 자생적 사회주의자로 전쟁 발발 후 신불산에서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다 1952년 체포되었다. 장기수로 형기 20년을 채우고 1972년 출소 후 가정을 꾸려 생활하던 중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삼팔선 북쪽을 밟아 본 적이 없는 남쪽 출신인 데다가 가족이 모두 남한에 거주하면서 송환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송환 대상자 가운데 드문 경우였다.
진달래꽃 피고 봄비 초록초록 내리는가 했는데 어느덧 푸름이 산자락에서 산 정상으로 올랐다. 6월이 오고 있다. 두렵다. 어린아이들 입에서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하며 부를 그 노래. 70년 동안 이런 의식으로 살아온 나라에 통일의 길은 멀고도 멀다.
신불산 책소개
http://sanzinibook.blog.me/20126745760?Redirect=Log&from=postView
지리산 외 하급 조직원 첫 기록…한국전 ‘비사’ 등 적어
“민주화 역주행? 사람사는 세상에 희망 없는 곳 없어”
생애사 펴낸 ‘신불산 마지막 빨치산’ 구연철씨
“바람이 나뭇잎 흔드는 소리를 들으면 죽으면서 잘 싸웠다고 말해달라던 소녀 대원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1천m급 ‘경남알프스’에 속하는 신불산(1209m)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마지막 빨치산’ 구연철(80)씨가 수기를 펴냈다. 부산울산경남열사장학문화사업회 기획으로 소설가 안재성씨가 구술을 받아 정리한 기록 <신불산>(산지니 펴냄)이다.
구씨는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나이 스물에 ‘친외세·반통일 세력’에 쫓겨 신불산으로 입산해 54년 4월 부산에서 체포될 때까지 3년9개월동안 조선노동당 경남도당 동해남부지구당 소속으로 대민 조직활동을 벌였다. 그의 마지막 직함은 제3소지구당 조직부장. 지리산 지역 외 하급 빨치산에 대한 기록은 처음이다. 그동안 평전이 나온 이현상·남도부(본명 하준수)· 정순덕(여성)은 지리산 또는 지휘관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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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는 책에서 알려지지 않은 비사를 전한다. ‘그가 입산했을 때 동해남부지구당은 모두 합쳐 30여명. 걸인행색에 무기는 99식 소총 서너 정뿐이었다. 재치와 부드러운 인상 탓에 울산군당 조직부 대원이 되었다. 갈산고지에 본부를 둔 전성기의 남도부 부대는 1천여명. 50년 말 남도부 부대가 수행한 형산강 다리폭파에 쓰인 폭약은 미군 다이너마이트로, 당시 신불산의 이천3리 계곡에 주둔한 미군 공병대가 빨간 부대깃발 탓에 빨치산 부대로 오인받아 미군기 폭격을 받아 쫓겨가면서 버린 것을 수습해 쓴 것이다. 51년 1월초 남도부 부대가 신불산에서 철수한 이유는 전술에 따른 것이 아니라 조직 갈등에서 비롯됐는데, 남도부가 중앙에서 지구당 명칭 변경을 구두로 받아오자 지역간부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도부는 3월에 명령서를 들고 다시 와 조직을 장악할 수 있었다.’
비전투대원인 구씨는 산 아래에 정보원을 만들어 보급품이나 정보를 얻는 일 또는 전투대원의 길 안내를 했다. 하지만 “52년 봄 울산~경주 비포장도로에서 미군 장갑차를 보급품 트럭으로 오인해 공격했다가 혼쭐이 났고, 무룡산 자락에서 매복한 국군 소대병력한테 헛총을 놔 쫓아보낸 뒤 먹거리를 구한 적도 있다”고 그는 털어놨다.
그는 지하당 조직을 위해 하산 뒤 가짜 도민증용 사진을 찍으려다 붙잡혀 20년동안 복역했다. 교도소에서는 재소자용 식량을 빼돌리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고, 7·4공동성명 뒤 자행된 전향공작에 대항해 고초도 겪었다. 74년 출옥해 막노동 현장을 전전하다가 80년대 후반,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서 오리농장을 차려 자리를 잡았다. 농장은 2009년 문을 닫기까지 20여 년 동안 지역 노동운동가들의 약속 장소였다.
그는 최근 민주화 역행 현상에 대해 “사회의 모순이 깊어지고 진보의 열정이 식어도 희망없는 세상은 없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진보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고 전했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출처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754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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