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19. (일)
주말 장마영향으로 역시 비예보, 토요일 감포 용굴 답사를 하며
문득 연계하여 함월산, 수년전 심한 알바로 생고생 했던 기억이 스치고...
일요일 비가 내린다니 그때와 같은 조건으로 걸음하여 보았습니다.
용연폭포(龍淵瀑布)
이 폭포는 2011년까지 지도상에도 '기림폭포'로 불렀는데, 왕의 길을 복원하며 『용연폭포』로 제 이름을 찾았습니다.
옥대 장식이 용으로 변해 승천하였다는 용연폭포, 만파식적 대나무와 함께 얻은 또 하나의 보물 검은 옥대로 신문왕이 만파식적 대나무와 옥대를 가지고 환궁할 때 마중 나온 태자의 예지로 옥대의 용 장식 하나를 떼어 시냇물에 담그니 진짜 용으로 변해 승천하고 시냇가는 깊이 패여 연못과 폭포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 만파식적(萬波息笛)의 기적
동해에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感恩寺)를 향해 오니 신문왕이 나아가 살펴보았다. 산 위에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이튿날 합하여 하나가 되니 풍우가 일었다.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나와 검은 옥대를 바치면서 "한쪽 손바닥을 치면 소리가 없고 두 손이 마주치면 소리가 나듯이, 이 대나무도 합쳐야만 소리가 나니 성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대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바다용이 된 선왕(先王: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 장군이 합심하여 이 보물을 나에게 갖다 바치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피리를 만들어 천존고(天尊庫)에 두었는데 이것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 비가 오고 비올 때 개이며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도 평정해졌다.
《삼국유사 기록 펌》
폭포 위에서 만난 비비추
불령_불령봉표
불령봉표에는 ‘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 즉 “연경의 묘에 쓸 향탄 즉 목탄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일반백성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임금의 명을 받아 불령에 봉표를 세운다” 뜻의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함월산 정상
함월산(含月山)달을 품은 산이란 뜻으로 경주국립공원 토함산지구에 속하며 추령을 사이에 두고 토함산과 마주하고 있으며 호미지맥 중추라 할 수 있다. 함월산 정상은 아주 넓은 평원을 이루고 있으며 숲이 무성해 조망이 없는 곳이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이어지던 길,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의 수중릉으로 행차했던 곳으로 2011년 길이 복원되었다. 추령과 기림사를 잇는 신문왕 호국행차 길, 즉 왕의 길로 함월산 아랫자락을 잇는 편도 3.9km의 걷기 좋은 숲길로 호젓한 산행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산행에서 필자는 왕의 길이 목적이 아니고 불령까지 왕의 길, 불령부터 호미지맥을 따르는 산걸음임을 알려 드립니다. 왕의 길에는 이정표가 잘 되어 있지만 일반 등로에는 이정표가 전혀 없으니 참고 하시면 될 듯 합니다.
기림사 대적광전(大寂光展) 문창살
기림사 자체가 모두 보물인 곳, 그중 대적광전(大寂光展) 꽃무늬 문창살이 아름다운 곳으로 5개의 문창살이 각기 다른 꽃 모양입니다.
◈ 기림사 홈피 : www.kirimsa.net/
◈ 기림사 주소 : 경북 경주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
불국사 보다 먼저 창건 되었다는 기림사, 여러번 찾은
기림사지만, 조용한 경내를 한바퀴 돌아 보았습니다.
비교적 자세한 내용은 지난 산행기를 참고 하시면 될 듯 합니다.
☞ 바로가기_blog.daum.net/mkhur1004/1469
▣ 대 상: 경주_함월산
▣ 주 소: 들/날머리_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 (기림사)
▣ 코 스: 기림사_P ~ 왕의 길 ~ 용연폭포 ~ 삼거리(좌측) ~ 불령(사거리) ~ 호미지맥 능선 ~ 481봉 ~ 삼거리 ~
함월산 정상 ~ 삼거리 ~ 도통골 ~ 삼거리 ~ 용연폭포 ~기림사_P 【산행시간】입산12:10~하산17:40
▣ 일 시: 2020년 7월 19일 (일)
▣ 날 씨: 흐림 & 가끔 비
▣ 일 행: 조릿대 & 짱
▣ 이 동: 자가 운전_(왕복110km)_울산 출발 10:20_울산 도착 19:20
▣ 비 용: 기림사 문화재 관람료: 3,000원*2/ 주차료: 1,000_7,000원
♧ 포토 에세이 ♧
코로나로 인해 자유롭지 못하지만, 토요일 감포 용굴에 연계하여 함월산을 걸음하기로 하고, 이미 구라청 비예보가 있지만 오랜만에 우중산행도 할 겸 일요일 늦으막히 출발하는데 이미 비가 내리기 시작 합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함월산인데, 문득 용굴 가는길에 이견대에서 잠시 정차하여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니 다시 함월산을 찾고 싶어진 것, 더해 수년전 심한 알바를 했던 곳이기에 되갚아 주기도 할 겸, 다시 찾은 함월산 또 한 추억으로 남겨 봅니다.
함월산 기림사 일주문
이곳 우측 임도길로 자동차로 진입, 기림사 뒤 적당한 곳에 패킹 후 산행채비하여 출~발~!
금방이라도 비내릴 듯 한 날씨, 우중 산행이 될 듯 합니다.
첫 이정표
개망초 가득 핀 길따라...
산문
왕의 길 따라...
길 옆 축대가 인상적인 곳, 한줄한줄 대각으로 쌓아 올린 축대는 언제 만들어 졌는지, 우리민족의 손재주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연폭포 입구
커다란 바위 위에는 나미아미타불이라 음각이 있습니다.
욍의길에서 보면 용연폭포가 보이지 않아 무심코 지나면 지나칠 수 있으나 지금은 폭포 조망 데크가 설치되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 용연폭포
용연폭포 전경
그런데, 용연폭포 전망데크에 왠 씨끄러운 소리,,,한 단체팀이 전망대에 전를 펴고 음주 중, 고성방가는 기본, 아~!!!
정말 육두문자 나올 일, 하는 수 없이 팬스를 넘어 폭포 앞으로 다가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곧 피해 주겠지, 30여분 이상 기다려도 술판은 이어지고 가무까지...정말 부하가 치밀어 올라 참느라 애썼습니다.
음주가무 고성방가를 무릎쓰고 용연폭포를 열심히 담기, 내린 비로 지금까지 보아 왔던 용연폭포 수량 중 최고 였습니다.
이 폭포는 2011년까지 지도상에도 '기림폭포'로 불렀는데, 왕의 길을 복원하며 『용연폭포』로 제 이름을 찾았습니다.
옥대 장식이 용으로 변해 승천하였다는 용연폭포, 만파식적 대나무와 함께 얻은 또 하나의 보물 검은 옥대로 신문왕이 만파식적 대나무와 옥대를 가지고 환궁할 때 마중 나온 태자의 예지로 옥대의 용 장식 하나를 떼어 시냇물에 담그니 진짜 용으로 변해 승천하고 시냇가는 깊이 패여 연못과 폭포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용연폭포 좌벽
아~정말...!
폭포 전망덱에서 일어나는 일, 부아 치밀어 오르지만 참은인을 수 없이 되내이고...!
아~관세움보살~~~!!!
아직 저런 인간들이 있다니,,,아지매들 고성방가까지...폭포 소리때문에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취기까지 오르니 정말 *판이 따로 없는 현실...이를 어쩔꼬...!
폭포 하류
고성방가 음주가무 현장에서 30여분 이상 머물며 지켜보다 결국 우리가 피하는게 상책일 듯...!
폭포 위 용연폭포 안내판
용연폭포 상단에 내려서...내려다 보고
폭포 내려다 보고
폭포 소리가 우렁차지만, 폭포 전망대에 저 인간들 고성방가는 끝날 줄 모르니...정말 부끄러운 현실이 안탑깝웠습니다.
폭포 위 외롭게 핀...비비추
삼거리_ ↖볼령 ↗도통골 ↓기림사
우선 우리는 불령까지 왈의 길을 따릅니다.
불령 도착
불령봉표
불령봉표에는 ‘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 즉 “연경의 묘에 쓸 향탄 즉 목탄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일반백성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임금의 명을 받아 불령에 봉표를 세운다” 뜻의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 효명세자와 불령봉표에 대하여 ◈
불령봉표’는 비록 신라시대 문무왕 신문왕의 역사흔적을 답사하는 만파식적의 길과는 약 1천200여년의 시차를 가지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리는 효명세자가 죽은 다음해인 신묘년(1831년)에 그의 묘에 사용할 제수에 필요한 경비를 기림사 일원의 산으로 정해 이 부근의 산에서 나오는 묵탄을 생산해 충당한 것을 기록하는 소중한 문자기록유물이다.
이 때 해당지역에 대해 일반인들의 출입과 벌목을 금지하기 위한 봉금정책을 실시함과 이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인데, 현재 ‘불령봉표’와 ‘시령봉표’가 발견됐다.
모차골 산길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불령봉표에는 ‘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 즉 “연경의 묘에 쓸 향탄 즉 목탄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일반백성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임금의 명을 받아 불령에 봉표를 세운다” 뜻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연경’은 조선왕조 제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 태어난 외아들인 효명세자의 묘호이고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였다.
효명세자의 묘는 처음엔 서울 석관동 천장산 의릉(경종의 릉) 왼쪽에 안장되었으나,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익종으로 추존되고 수릉으로 승격하였고, 풍수상 이유로 양주 용마봉으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철종6년(1855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건원릉 왼쪽에 옮겨져 오늘날 동구릉이 불리는 왕릉군의 마지막 왕릉이 됐다.
동구릉은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을 비롯하여 현릉(5대 문종과 현덕왕후), 목릉(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휘릉(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숭릉(18대 현종과 명성왕후), 혜릉(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 원릉(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수릉(23대 순조의 세자인 추존왕 익종과 비 신정왕후), 경릉(24대 헌종과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등 아홉 개의 능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처음엔 ‘동오릉’또는 ‘동칠릉’이라 불리다가 1855년 철종때 양주에 있던 효명세자의 수릉이 이곳으로 이장되면서 아홉 개의 능이되어 ‘동구릉(東九陵)라 불리게 되었다.
불령봉표의 주인공 효명세자는 당시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 세력의 세도에 눌려 허수아비 왕노릇을 하던 순조가 비장의 카드로 선택을 하여 19살인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여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시킨 조선왕조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순조의 깊은 정치적인 뜻을 이어받은 효명세자는 김재찬을 기용하여 당시 세도가 안동김씨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으며, 역대 국왕 중에서 가장 예술적 문학적 조예가 깊고 뛰어 났으며 무엇보다도 춤을 사랑한 왕이었다.
아버지 순조의 정치적 염원과 기대를 한 몸에 지고 부왕의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 (순조27년 2월 18일부터 순조 30년 5월 6일까지) 기간동안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증명해 보였으나 갑작스런 의문의 급사를 하게된다.
비록 3년 3개월이라는 짧은 통치기간에도 불구하고 전례없이 황제식 궁중연향들을 벌이면서 궁중 무용의 창사와 가사를 직접 짓고 연행에 쓰이는 치사와 전문을 직접 지어 올리고 이름만 남은 옛 정재(궁중무용)들을 자신의 악장으로 되살려내고 연행의 규모를 확대하여 조선왕실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는 화려한 정재와 연향의 양식을 확립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3년여의 짧은 시기를 통해 조선왕조의 궁중 정재(궁중무용)의 수준을 정점으로 끌어올려 왕궁문화의 꽃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조선조 궁중 정재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조선말까지 전해진 53종의 조선왕조 궁중정재 중 26종의 정재를 직접 예제하고 재창작한 분이 바로 효명세자였다.
불령 이정표
불령 사거리_ ↖함월산 ↗기림사 ↙모차골 ↘추령
우리는 함월산까지 능선으로...
옛 길 축대도 예술 입니다.
첫번째 암봉 도착
잠시 휴식
아직 비는 오지 않지만 좁은 등로 빗물 잔뜩 머금고 있는 나무로 인해 땀과 범벅이되어 물에 빠진 생쥐꼴이 따로 없네요.
설상가상 칙칙 감기는 거미줄로 인해 스틱을 상하로 휘저으며 거미줄을 헤치고 오르내립니다.
첫번째 암봉을 내려서 다시 481봉을 올라야 합니다.
481봉 묘지
481봉은 조망이 있는 곳인데...
오래전도 산행때도 똑 같은 날씨로 이곳 함월산에서는 시원한 조망과는 거리가 먼 듯합니다.
481봉에서 급경사 내리막을 쏟아져 내려서면, 안부 삼거리
국립공원지만 함월산 등로에는 별도 이정표는 없습니다.
삼거리_ ↑함월산 정상 ↗도통골 ↓불령
우리는 이곳으로 다시 빽하여 도통골로 하산을 할 예정입니다.
함월산 정상 오름길
제법 경사심한 곳을 올라 서야 정상에 당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 함월산 정상
함월산 정상
달을 품은 산, 이름이 참 아름다운 산 입니다.
정상은 축구장 몆개는 될 듯 한 넓고 숲이 우거져 있어 조망은 없는 곳입니다.
또한 국립공원이지만 번듯한 정상석이 아닌 초라한 정상목이 정상을 알리고 있으니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2012년 정상에는 이런 정상목도 없었는데, 위안 합니다.
▶ 2012년 함월산 정상
잠시 선채로 휴식 후 왔던길을 따라 되돌아 갑니다.
죠스가...ㅎ
다시 삼거리 도착
이정표 한개 쌓아 두고 도통골로 하산 합니다.
큰 암벽
잠시 급경사 쏟아져 내려서면 암벽인데...사진은 누워 있는 듯 하고...!
합수부 건너고
계곡이 어지러워 길을 잘 찾아야 하는 곳 입니다.
우측으로 다시 계곡을 건너 진행햐야...길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한동안 내려서면 쌍무덤을 만나고 곧 임도를 만나게 됩니다.
다시 왕의 길 삼거리 도착
다시 만나는 용연폭포
조용한 것을 보니 이제 그인간들이 자리를 떠난 듯 합니다.
폭포 전망대에서 본 용연폭포
폭포 전망대
주말이면 이 폭포를 보러오는 이들 많을텐데, 제발 산에서의 예의를 간절히 호소하고 싶네요.
▶ 용연폭포 영상
수량 좋은 용연폭포를 뒤로 하고 마저 하산 합니다.
개망초 지천
기림사 뒤 고목
고목에 핀 손톱만한 버섯
산행 종료, 푹 젖은 옷 뽀송한 옷 갈아 입으니 더 없이 행복감 밀려 오고...
여러번 찾은 기림사지만 기림사 한바퀴 돌아 보려 들어 섭니다.
▶ 기림사
기림사 일주문
기림사 사천왕문
사천왕문 앞 불두화
불두화 색갈이 다양하니 꽃 치장을 해놓은 듯 합니다.
입가심 하고...
범종각
기림사 진남루
옛 선조들의 손재주가 여실히 보여집니다.
진남루
진남루는 남방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남방은 일본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당시 기림사는 전략요충지로서 경주지역 의병과 승병 활동의 중심 사원이었으며, 이 지역 다른 사원과 달리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경주부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영부안선생]이나 [호장안]등 수많은 문헌들은 당시 호장 최락에 의해 기림사로 옮겨져 잘 보관 된 결과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됐다. 이때 이 진남루는 승군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건물 형태는 익공계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상부 구조 수법이 돋보이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기림사 응진전과 삼측석탑
응진전 [경북 유형문화재 제214호]
오백나한상을 모신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장대석 1단의 얇은 기단 위에 화강석 주초를 놓고 전 후면에는 두리기둥을, 측면에는 각진기둥을 세웠는데 후면의 기둥은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바리를 하였다.
공포는 내외 2출목이다. 내부 살미의 형태는 주심포에다. 교두점 차단과 양봉이 주간포에는 교두점 차단과 삼분도 요두(要頭)를 각각 얹었다. 가구는 5량가이며 대량과 종량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웠다. 천장은 빗반자를 치고 단청을 하였는데 천장 전체가 빗반자로 된 경우는 드물다. 바닥은 우물 마루를 깔았으며 문비 구성은 전면 각칸에 이분합(二分合)교살문을 달았다. 이러한 형태를 볼 때 관룡사 대웅전의 모양과 흡사한 조선중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2002년 4월 개분불사를 하는 중에 오백나한 복장에서 조성당시에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발원문이 나왔다. 여기에 보면 조성년도가 옹정7년(擁正七年)이다 서기로는 1729년이고 우리나라 연호로는 영조5년이다. 불상조각에 참여하신 분은 금산사 스님 4분과 본사스님 3분이다.
기림사 대적광전(祇林寺大寂廣殿)
기림사 대적광전은 보물 제833호로써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 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것으로 지금 건 물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크게 고쳤을 때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를 할 때 옛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약사전[경북 유형문화재 제252호]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약사전은 동방 만월 세계에서 중생 교화를 맡고 계신 약사 여래불을 모신 전각이다.
사람의 병을 고치고 , 번민에서 구제하시는 부처님으로 약사유리광여래불(藥師琉璃光如來佛),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한다. 보살로서 수행하고 있을 때에 12대원(大願)을 발했다고 한다. 중생의 병을 제거하며, 모든 감각기관을 완비시켜 해탈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다. 일광(日光)보살, 월광(月光)보살을 각각 좌우 협시(脇侍)로서 약사삼존(藥師三尊)으로 삼으며,
권속에는 호법신(護法身)으로서의 12신장을 모신다.
삼존불상...소조비로자나삼존불상(祇林寺塑造毘盧舍那三尊佛像)
가운데 비로자나불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모셔 삼신불(三身佛)을 이루는데, 흙으로 빚은 이 세 불상은 손의 위치와 자세만 다를 뿐 표정과 모양이 거의 같고 옷 주름까지도 비슷하다. 상체는 장대하나 무릎은 빈약하게 느껴지며, 네모난 얼굴은 강인한 표정이 엿보인다. 적절한 두께로 주름을 세겨넣은 옷자락 표현이 장대한 몸체에 잘 어울리는데, 왼쪽 무릎 위로 접어 올린 옷자락이 비로자나불만 살짝 한 겹 더 접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만 삼존불일 경우에는 좌우 부처들이 두 손을 서로 대칭되게 한쪽씩 드는 것이 보통이나 이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은 둘 다 오른손을 들고있는 것이 색다르다. 1740년에 간행된 [기림사 사적]에서는 대적광전 내부에 흙으로 만든 삼세여래상을 봉안하였으며,
이 때의 증사가 은점산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신불의 교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법신불(法身佛)
비로자나불,순수하고 차별상이 없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형상화한 부처님이다. 일체의 존재는 그것의 나타남이다.
보신불(報身佛)
노사나불, 과거의 수행에 의한 공덕, 모든 미덕을 구비한 이상적인 인격으로서의 부처님이다.
과거 세상에 모든 만행 선근공덕의 보답으로 갖추어지는 부처님의 모습이다.
화신불(化身佛)
중생을 교화 구제하려고 부처님 자신이 중생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나타난 것을 말한다.
현세에 인간의 모습으로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천백억 화신불이다.
삼신불(三身佛)은 세 부처님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부처님의 세 가지 관점을 묘사한 것이다.
형상을 여윈 진리에서의 법신불과 만행공덕의 측면인 보신불과 실제 역사 속에서 이 모든 것을 구현하시고
중생을 구제하신 교화의 관점인 화신불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기림사 홈피 자료: www.kirimsa.net/
응진전, 삼층석탑, 진남루
기림사 대적광전(大寂光展) 문창살
기림사 자체가 모두 보물인 곳, 그중 대적광전(大寂光展) 꽃무늬 문창살이 아름다운 곳으로 5개의 문창살이 각기 다른 꽃 모양입니다.
삼층석탑[경북 유형문화재 제205호]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 서쪽에 오백나한전이 있고 바로 그 앞에 높이 3m 쯤 되는 아담한 3층석탑이서 있다. 감은사 탑과 같은 돌인 안산암(安山岩)으로만들었는데, 2중의 기단 위에 3층으로 몸체 돌과 지붕돌을 쌓았고 그 위에 노반, 복발, 앙화까지 남아 있다. 아랫기단은 낮은데, 한 면에 3개씩의 기둥모양이 새겨져있고 , 위 기단은 높은데 각 면마다 기둥 셋이 새겨져있다. 몸체 돌에는 층마다 모서리 기둥을 새겼는데, 아래는 굵게, 위는 좁게 나타내는 엔타시스(배흘림) 양식이다. 처마 끝은 4단으로 돼있다. 크기도 작지만 , 기단의 기둥수, 처마 받침의 단수가 줄어들어 ,통일 신라의 일반형이이면서 ,시대 말기 것으로 보인다. 석탑 동쪽의 보리수밑에는 목탑(木塔)터가 남아 있다. 언젠가 목탑이 소실되고 난 뒤 재건하지 못하고 ,대신 자그마한 석탑을 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응진전 뒤
삼천불전
1817년(순조17년)에 초의선사가 기림사 근방에서 나는 옥돌로 천불을 조성해 모셨다가 1818년(순조18년)에 해남 대둔사로 이운을 해서 대둔사 천불전에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1990년경)에 지어진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108평의 거대한 크기이다. 안에는 삼천불이 모셔져 있다. 이는 항상 어디에서나 부처님이 계신다는 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연꽃과 명부전
정면 3칸 맞배지붕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모셨다. 지장보살은 도리천에서 석가여래의 부촉을 받고 매일 아침 선정에 들어 중생의 근기를 관찰한다. 석존이 입멸 후부터 미륵불이 출현 할 때까지 몸을 6도에 나타내어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한 보살이다. 석장을 짚은 사문의 모습의 형상을 하고 계시며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고 나서 부처가 되겠다는 거대한 서원을 세운 대비대원(大悲大願)보살이다.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協侍)하고 있다. 명부시왕은 죽은 자의 영혼이 가는 명계(冥界)를 다스리는 열 분의 왕이다. 시왕은 진광대왕(秦廣大王), 초강대왕(初江大王),송재대왕(宋宰大王), 오관대왕(五官大王), 염라대왕(閻羅大王), 변성대왕(變成大王), 태산대왕(泰山大王), 평등대왕(平等大王), 도시대왕(都市大王),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이다.
다시 대적광전
저녁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너무 조용한 기림사를 나서고...
오랜만에 다시 찾은 함월산 산행을 마무리 합니다.
발목 통증으로 또 절뚝이지만 이 행복함, 산은 늘 감사함 입니다.
감사합니다^^
'″°³ 산행후기 ³°″ > 국 내 전 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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