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연폭포[기림폭포]
요즘 같은 긴 가믐에도 골이 깊어 수량이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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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름』경주 양북 [함월산 추령릉 신문왕 호국행차길]
『산행지』경북 경주 양북면 호암리
『코 스』기림교→395봉→불령→481봉→함월산정상→추령능선→수랫재→497봉→모차골→신문왕 호국행차길
→수랫재→세수방→불령봉표→용연폭포(기림폭포)→기림사→기림교[원점회귀]
『일 시』2012년06월15일 (금) 총산행시간6시간...순보행시간5시간30분
『일 행』나홀로 [날씨:흐리고 비...조망 無 산행]
『이 동』자가운전 [11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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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연폭포
벼랑 바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용연폭포
△ 용연폭포
이제 것 기림폭포로 알려져 있었는데...
신문왕 행차길을 복원하며...『용연폭포』로 제 이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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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고찰...기림사
대적광전(大寂光展) 보물 제833호
△ 대적광전(大寂光展) 문창살
대적광전(大寂光展) 꽃무늬 문창살이 아름다운 곳
5개의 문...문창살이 각기 다른 꽃 모양이다
△ 대적광전(大寂光展) 삼존불상
소조비로자나삼존불상(祇林寺塑造毘盧舍那三尊佛像)
거대한 몸짓에서 베어나오는 인자함이 근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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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후기 ♧
오랫동안 숙제로 남겨 두었던 곳, 함월산릉 걷기를 이제야 실천에 옮긴다
산 자체는 높지 않은 곳이지만 워낙 산줄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골 깊은 곳이다
포항 앞 바다와 감포 앞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인데...
바다는 커녕 산중 바로 코앞도 조망 못한 산행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산에 들어 행복했던 하루를 회상하며...!
아침부터 잔뜩 찌뿌린 날씨는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 부울 것 같은 날씨, 개의치 않고 집을 떠난다
기림사 앞 공터에 주차를 하고 산행을 시작하려니 간간히 빗방울 떨어지고 온 산은 검은 구름에 휩싸여 있다
영 어설픈 산행이 되겠거니...기림교 앞 민가 몇채가 있는 곳 대밭으로 들어서려니
송아지만 한 검은 개가 개거품 물면서 짓어 대고...경개를 바짝하고 개와 눈싸움 하고...!
개 주인장은 왜 길 가운데 그런 험한 두상을 가진 개를 묶어 두었는지...참내원
한방 내리쳐 졸도라도 시키고 싶은 심정..."거친 세상이니 그냥 꾹"~ 참고 말았다
대밭에 들어서 바로 능선으로 치고 오르니, 습한 날씨로 땀은 금새 흘려 내린다
△ 능선길 올라서 진행
361봉 올라 395봉으로 이어지는 길...능선 날카롭고 흙과 돌무더기가
범벅이 되어 계속 이어지는 것 보니...아마도 산성이 있었던 능선인 것 같다
△ 395봉 오름길
주위에는 금방 멧돼지가 목욕을 했는지 온통 파헤쳐저 있고
주위 가시거리는 채 10여미터도 되지 않는다
△ 395봉 만디
자칫 길을 잘 못 이어갈 수 있는 곳이다
보이는 우측에서 올라서 사진 찍은 방향으로 직진 하기가 쉬운 곳
많이들 알바를 했는지...길이 묵지 않았다
가야 할 길은 우측에서 올라서면 우측 직각으로(사진상 좌측)길 급한 내리막으로 쏟아져야 한다
사진찍은 방향으로 직진하면, 약 20여미터 진행하면 묘지가 나타난다
그러면 지체 없이 되 돌아 나와야 한다...일부러 묘지까지 진행하여 보았다
조망이 전혀 없으니, 능선길 이어가기가 헷갈리는 곳이 제법 있었다
△ 사진 찍을 일 없으니...이런 짓도 해본다
꽃 이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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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격하게 낮추었다 높혔다를 세번 반복하니
전방에 깔끔한 이정표가 있다
이곳에 왠 이런 깔끔한 이정표가 있을까 자세히 살피니
신문왕 호국행차길...수렛길을 국립공원에서 새로히 복원해 놓은 것이였다
△ 불령봉표
불령봉표에는 ‘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 즉 “연경의 묘에 쓸 향탄 즉 목탄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일반백성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임금의 명을 받아 불령에 봉표를 세운다” 뜻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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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와 불령봉표◈
불령봉표’는 비록 신라시대 문무왕 신문왕의 역사흔적을 답사하는 만파식적의 길과는 약 1천200여년의 시차를 가지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리는 효명세자가 죽은 다음해인 신묘년(1831년)에 그의 묘에 사용할 제수에 필요한 경비를 기림사 일원의 산으로 정해 이 부근의 산에서 나오는 묵탄을 생산해 충당한 것을 기록하는 소중한 문자기록유물이다.
이 때 해당지역에 대해 일반인들의 출입과 벌목을 금지하기 위한 봉금정책을 실시함과 이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인데, 현재 ‘불령봉표’와 ‘시령봉표’가 발견됐다.
모차골 산길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불령봉표에는 ‘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 즉 “연경의 묘에 쓸 향탄 즉 목탄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일반백성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임금의 명을 받아 불령에 봉표를 세운다” 뜻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연경’은 조선왕조 제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 태어난 외아들인 효명세자의 묘호이고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였다.
효명세자의 묘는 처음엔 서울 석관동 천장산 의릉(경종의 릉) 왼쪽에 안장되었으나,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익종으로 추존되고 수릉으로 승격하였고, 풍수상 이유로 양주 용마봉으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철종6년(1855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건원릉 왼쪽에 옮겨져 오늘날 동구릉이 불리는 왕릉군의 마지막 왕릉이 됐다
동구릉은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을 비롯하여 현릉(5대 문종과 현덕왕후), 목릉(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휘릉(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숭릉(18대 현종과 명성왕후), 혜릉(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 원릉(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수릉(23대 순조의 세자인 추존왕 익종과 비 신정왕후), 경릉(24대 헌종과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등 아홉 개의 능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처음엔 ‘동오릉’또는 ‘동칠릉’이라 불리다가 1855년 철종때 양주에 있던 효명세자의 수릉이 이곳으로 이장되면서 아홉 개의 능이되어 ‘동구릉(東九陵)라 불리게 되었다.
불령봉표의 주인공 효명세자는 당시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 세력의 세도에 눌려 허수아비 왕노릇을 하던 순조가 비장의 카드로 선택을 하여 19살인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여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시킨 조선왕조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순조의 깊은 정치적인 뜻을 이어받은 효명세자는 김재찬을 기용하여 당시 세도가 안동김씨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으며, 역대 국왕 중에서 가장 예술적 문학적 조예가 깊고 뛰어 났으며 무엇보다도 춤을 사랑한 왕이었다.
아버지 순조의 정치적 염원과 기대를 한 몸에 지고 부왕의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 (순조27년 2월 18일부터 순조 30년 5월 6일까지) 기간동안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증명해 보였으나 갑작스런 의문의 급사를 하게된다.
비록 3년 3개월이라는 짧은 통치기간에도 불구하고 전례없이 황제식 궁중연향들을 벌이면서 궁중 무용의 창사와 가사를 직접 짓고 연행에 쓰이는 치사와 전문을 직접 지어 올리고 이름만 남은 옛 정재(궁중무용)들을 자신의 악장으로 되살려내고 연행의 규모를 확대하여 조선왕실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는 화려한 정재와 연향의 양식을 확립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3년여의 짧은 시기를 통해 조선왕조의 궁중 정재(궁중무용)의 수준을 정점으로 끌어올려 왕궁문화의 꽃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조선조 궁중 정재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조선말까지 전해진 53종의 조선왕조 궁중정재 중 26종의 정재를 직접 예제하고 재창작한 분이 바로 효명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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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령봉표를 확인하고 계속 능선길 건너편으로 이어간다
△ 전망 좋을듯한 암봉에 올라선다
하지만...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이런 바위도 지나고
△ 이런 바위도 오른다
△ 바위와 기이한 소나무가 지천으로 꽉차 있다
△ 481봉 무덤이 있는 바위 전망봉
묘지를 새로히 단장했는지...풀 한포기 없는 묘지가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조망 없으니, 쉬여갈 이유도 없고 베낭 벗을 일 없다
481봉에서 다시 쏟아져 내렸다 안부에서 다시 함월산 정상까지 치고 올라야 한다
간간히 쏟아지는 비로 인해 잡목 우거진 길 오르내리기 영 어설프다
비 옷 입기 그렇고...잡목에서 감기는 빗물이 벌써 옷을 다 적신지 오래다
거기다 흘리는 땀까지 더하니...옷자락 잡아 비틀면 줄줄 물이 흐른다
△ 드넓은 함월산 정상 도착
함월산 정상에 나무가 없으면 축구장 두서너개는 나올 듯 ㅋ~
처음으로 베낭을 벗고 쉬어 간다
△ 함월산 정상에서 혼자 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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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갈등...부산일보 산행팀에서 소개된 코스를 예정 했으나
영 밋밋하다...그래서 우측길 버리고 좌측길 들어선다
추령으로 향하는 능선길...토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들어서 이어가다
모차골로 떨어지면 새로히 단장해 놓은 신문왕 호국행차길로 원점회귀 하면 될 듯 하다
불령에서 신문왕 행차길 개념도 안내를 참고하면 모차골에서 회귀하면 될 일
잡목 더 성가시게 칙칙 감기지만, 오르락 내리락 땀꽤나 쏟아야 한다
△ 550봉 전망바위
먹구름 더 짙어지고 시계거리 5m정도 되려나...!
오르락 내리락 하는 재미로 능선길 이어간다
또 앞에 깔끔한 이정표가 나타나고...수렛재라고 명하고 있다
신문왕 행차길이 모차골에서 기림사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 가끔 큰 터 나오면 어김없이 묘지가 있다
△ 삼각점이 있는 507봉
페 헬리포트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급한 경사로 안부까지 쏟아져 내리고 다시 497봉 오른다
497봉에서 조금더 능선길 이어가다...적당한 사면 골라 길 없는 곳이지만
모차골로 떨어져, 모차골 상류 지류 골짝 따라 내려 선다
△ 대충 내려서는 모차골 지류
△ 골짝 따라 계속 내려서면 모차골 본류를 만날 수 있을 것
마지막 덤불 헤치고 내려서니 고속도로 같은 길이 반겨준다
△ 모차골 본류와 등산로
좋은길 따라 올라 서니 이정표와 안내판이 반겨준다
바로 신문왕 호국행차길...대형 안내판이다
△ 모차골 풍경
모차골은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곳
△ 이정표
신문왕 호국행차길에 가끔 설치된 이정표다
△ 모차골 상류
수렛재 오르는 길...자연미가 그대로 살아 있고
숲 우거진 곳이라 했빛도 들어오지 않을 듯
추령 향하던 능선길에서 만났던 수렛재를 넘고 사면 가로질러 길 이어지고
계곡물 흐르는 곳에 도착...지도 들어다 보니 세수방이라는 곳이다
세수방은 신문왕 일행들이 세수하며 쉬여 간곳이라고 한다
세수방에서 잘 닦여진 신문왕 행차길은 좌측으로 구불어져 다시 불령을 오르게 되고
불령봉표에 도착하니 이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걸음 더 바빠지고...산중에서 점심도 먹지 않고 계속 꾸준히 걸었는데
비까지 만나야 되나니, 간간히 비가 내렸지만 빗줄기 제법 굻어진다
△ 불령 내려서 만나는 도통골
조금 더 내려서면 용연폭포일 것이다
△ 안전난간 넘어서 벼랑에서 내려다 보이는 용연폭포
이 가믐에 제법 폭포 물기둥 낙차하고 있다
이번 비가 좀 많이 내려야 할 텐데...!
△ 용연폭포 전 암벽
나무아미타불 각자가 새겨져 있다
△ 용연폭포 근경...폭포 무척 아름답다
옥대 장식이 용으로 변해 승천하였다 하여 용연폭포라고 한다
△ 용연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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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이 만파식적 대나무와 옥대를 가지고 환궁할 때
마중나온 어린 태자의 예지로 옥대의 용 장식 하나를 떼어
시냇물에 담그니 진짜 용으로 변해 승천하고 시냇가는 깊이 패여
연못과 폭포가 생겨 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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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萬波息笛)의 기적◈
동해에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感恩寺)를 향해 오니 신문왕이 나아가 살펴보았다. 산 위에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이튿날 합하여 하나가 되니 풍우가 일었다.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나와 검은 옥대를 바치면서 "한쪽 손바닥을 치면 소리가 없고 두 손이 마주치면 소리가 나듯이, 이 대나무도 합쳐야만 소리가 나니 성왕께서 소리로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대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바다용이 된 선왕(先王: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 장군이 합심하여 이 보물을 나에게 갖다 바치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피리를 만들어 천존고(天尊庫)에 두었는데 이것을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 비가 오고 비올 때 개이며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도 평정해졌다.
▒ 삼국유사 기록 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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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연폭포
빗줄기 세차 지고, 이제 다 하산한 길, 젖은 몸이니
뭐 별 대수롭게 생각치 않고 폭포 여러컷 담아 보았다
오늘 처음으로 카메라 부파인더 풍경 좋은 그림이니 눈이 호강이다
△ 용연폭포
폭포 양쪽으로 큰 바위가 벼랑을 이루고 있어 마치 폭포를 숨겨 두는 듯 하다
폭포 돌아서 나와, 기림사까지 넓은 임도길 따라 내려 선다
△ 기림사 주변의 노거수
△ 기림사 옆 도통골 풍경
마치 늪지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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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 굻어 져...카메라 빗물 잔뜩 맞으니 좀 클치만...!
이미 폭포 촬영시 젖은 카메라기에 그냥 대충 물기 닦아내고 기림사 들어 서고
평일이라 그런지 조용한 기림사 들러 이곳 저곳 둘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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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림사...사천왕문
△ 기림사 대적광전(祇林寺大寂廣殿)
기림사 대적광전은 보물 제833호로써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 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것으로 지금 건 물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크게 고쳤을 때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를 할 때
옛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 대적광전(大寂光展)
각기 다른 꽃무니 문창살 안으로 육중한 몸짓
소조비로자나삼존불상(祇林寺塑造毘盧舍那三尊佛像)
근엄하게 들여다 보인다
△ 소조비로자나삼존불상(祇林寺塑造毘盧舍那三尊佛像)
△ 삼존불상...소조비로자나삼존불상(祇林寺塑造毘盧舍那三尊佛像)
가운데 비로자나불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모셔 삼신불(三身佛)을 이루는데,
흙으로 빚은 이 세 불상은 손의 위치와 자세만 다를 뿐 표정과 모양이 거의 같고 옷 주름까지도 비슷하다.
상체는 장대하나 무릎은 빈약하게 느껴지며, 네모난 얼굴은 강인한 표정이 엿보인다.
적절한 두께로 주름을 세겨넣은 옷자락 표현이 장대한 몸체에 잘 어울리는데,
왼쪽 무릎 위로 접어 올린 옷자락이 비로자나불만 살짝 한 겹 더 접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만 삼존불일 경우에는 좌우 부처들이 두 손을 서로 대칭되게 한쪽씩 드는 것이 보통이나
이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은 둘 다 오른손을 들고있는 것이 색다르다.
1740년에 간행된 [기림사 사적]에서는 대적광전 내부에 흙으로 만든 삼세여래상을 봉안하였으며,
이 때의 증사가 은점산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신불의 교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법신불(法身佛)
비로자나불,순수하고 차별상이 없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형상화한 부처님이다. 일체의 존재는 그것의 나타남이다.
보신불(報身佛)
노사나불, 과거의 수행에 의한 공덕, 모든 미덕을 구비한 이상적인 인격으로서의 부처님이다.
과거 세상에 모든 만행 선근공덕의 보답으로 갖추어지는 부처님의 모습이다.
화신불(化身佛)
중생을 교화 구제하려고 부처님 자신이 중생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나타난 것을 말한다.
현세에 인간의 모습으로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천백억 화신불이다.
삼신불(三身佛)은 세 부처님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부처님의 세 가지 관점을 묘사한 것이다.
형상을 여윈 진리에서의 법신불과 만행공덕의 측면인 보신불과 실제 역사 속에서 이 모든 것을 구현하시고
중생을 구제하신 교화의 관점인 화신불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기림사 홈피 자료: http://www.kirimsa.net/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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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상
대적광전 문창살이 너무 아름답다
5개의 문에 꽃무니 문창살 모양이 제 각기 다르다
△ 대적광전 삼존불상
△ 대적광전(大寂光展)의 아름다운 문창살
대적광전의 5개의 문창살이 모두 다른 모양으로 조각되어져 있다
△ 대적광전 꽃무니 문창살
△ 삼층석탑과 대적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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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적광전
△ 응진전[경북 유형문화재 제214호]
오백나한상을 모신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장대석 1단의 얇은 기단 위에 화강석 주초를 놓고 전 후면에는 두리기둥을,
측면에는 각진기둥을 세웠는데 후면의 기둥은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바리를 하였다.
공포는 내외 2출목이다. 내부 살미의 형태는 주심포에다
교두점 차단과 양봉이 주간포에는 교두점 차단과 삼분도 요두(要頭)를 각각 얹었다.
가구는 5량가이며 대량과 종량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웠다.
천장은 빗반자를 치고 단청을 하였는데 천장 전체가 빗반자로 된 경우는 드물다.
바닥은 우물 마루를 깔았으며 문비 구성은 전면 각칸에 이분합(二分合)교살문을 달았다.
이러한 형태를 볼 때 관룡사 대웅전의 모양과 흡사한 조선중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2002년 4월 개분불사를 하는 중에 오백나한 복장에서 조성당시에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발원문이 나왔다.
여기에 보면 조성년도가 옹정7년(擁正七年)이다 서기로는 1729년이고 우리나라 연호로는 영조5년이다.
불상조각에 참여하신 분은 금산사 스님 4분과 본사스님 3분이다.
오백아라한은 정확히 526분의 성자이다.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10대 제자, 16성중(聖衆)과 500성중(聖衆)이다.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간 최고 단계에 있는 사람이다.
아라한에 관한 설명은 다음의 법구경에 나온 게송으로 알 수 있다
△ 응진전 오백나한상
△ 응진전과 삼층석탑
△ 삼층석탑[경북 유형문화재 제205호]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 서쪽에 오백나한전이 있고 바로 그 앞에 높이 3m 쯤 되는 아담한 3층석탑이서 있다.
감은사 탑과 같은 돌인 안산암(安山岩)으로만들었는데, 2중의 기단 위에 3층으로 몸체 돌과 지붕돌을 쌓았고
그 위에 노반, 복발, 앙화까지 남아 있다.
아랫기단은 낮은데, 한 면에 3개씩의 기둥모양이 새겨져있고 , 위 기단은 높은데 각 면마다 기둥 셋이 새겨져있다.
몸체 돌에는 층마다 모서리 기둥을 새겼는데, 아래는 굵게, 위는 좁게 나타내는 엔타시스(배흘림) 양식이다.
처마 끝은 4단으로 돼있다. 크기도 작지만 , 기단의 기둥수, 처마 받침의 단수가 줄어들어 ,통일 신라의 일반형이이면서 ,시대 말기 것으로 보인다.
석탑 동쪽의 보리수밑에는 목탑(木塔)터가 남아 있다.
언젠가 목탑이 소실되고 난 뒤 재건하지 못하고 ,대신 자그마한 석탑을 세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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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남루
진남루는 남방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남방은 일본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당시 기림사는 전략요충지로서 경주지역 의병과 승병 활동의 중심 사원이었으며,
이 지역 다른 사원과 달리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경주부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영부안선생]이나 [호장안]등 수많은 문헌들은 당시
호장 최락에 의해 기림사로 옮겨져 잘 보관 된 결과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됐다.
이때 이 진남루는 승군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건물 형태는 익공계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상부 구조 수법이 돋보이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 약사전[경북 유형문화재 제252호]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약사전은 동방 만월 세계에서 중생 교화를 맡고 계신 약사 여래불을 모신 전각이다.
사람의 병을 고치고 , 번민에서 구제하시는 부처님으로 약사유리광여래불(藥師琉璃光如來佛),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한다.
보살로서 수행하고 있을 때에 12대원(大願)을 발했다고 한다.
중생의 병을 제거하며, 모든 감각기관을 완비시켜 해탈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다.
일광(日光)보살, 월광(月光)보살을 각각 좌우 협시(脇侍)로서 약사삼존(藥師三尊)으로 삼으며,
권속에는 호법신(護法身)으로서의 12신장을 모신다
△ 명부전
정면 3칸 맞배지붕의 건물로 안에는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모셨다.
지장보살은 도리천에서 석가여래의 부촉을 받고 매일 아침 선정에 들어 중생의 근기를 관찰한다.
석존이 입멸 후부터 미륵불이 출현 할 때까지 몸을 6도에 나타내어 천상에서 지옥까지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한 보살이다.
석장을 짚은 사문의 모습의 형상을 하고 계시며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고 나서 부처가 되겠다는 거대한 서원을 세운
대비대원(大悲大願)보살이다.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協侍)하고 있다.
명부시왕은 죽은 자의 영혼이 가는 명계(冥界)를 다스리는 열 분의 왕이다.
시왕은 진광대왕(秦廣大王), 초강대왕(初江大王),송재대왕(宋宰大王), 오관대왕(五官大王), 염라대왕(閻羅大王),
변성대왕(變成大王), 태산대왕(泰山大王), 평등대왕(平等大王), 도시대왕(都市大王),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이다
△ 삼천불전
1817년(순조17년)에 초의선사가 기림사 근방에서 나는 옥돌로 천불을 조성해 모셨다가
1818년(순조18년)에 해남 대둔사로 이운을 해서 대둔사 천불전에 모셨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1990년경)에 지어진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108평의 거대한 크기이다.
안에는 삼천불이 모셔져 있다. 이는 항상 어디에서나 부처님이 계신다는 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의 의미를 담고 있다
△ 삼천불전
△ 기림사 일주문
빗줄기 굻어졌다 가늘어졌다 반복하고 기림사 나서 원점회귀 하였다
점심도 거르고 한 산행이라 배도 고프고, 매표소 안 식당에서 식사좀 하자고 하니 그냥 들어 보내 준다
비 맞으며 산행을 한 나를 보고 따끈한 커피 한잔 권했던 고마운 분을 기림사에서 만났다
지갑을 차에 놓아 두고 온터라, 지갑을 가지고 다시 그곳을 찾은 것이다.
그 고마움에 작은 나의 성의지만, 친절하신 그 분이 고아워서이다
뽀송한 옷 갈아 입으니, 상쾌...!
귀울길...비가 장대 같이 쏟아진다,
아무쪼록 가믐 심한 요즘 충분히 많은 비가 내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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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 족적[대충] ▽
[end]
[산행Photo원본 보기:경남 & 전국(120615)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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