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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 산행후기 ³°″/영남알프스

영남알프스 3대소_호박소 파래소 철구소 '20.6.14

Photo by 조릿대_2020. 6. 14(일)

 

주말 이틀동안 비가 내리고, 오랜만에 우중산걸음 하려니

 

왠지 내키지 않아, 오후 비그쳐가는 일욜 나들이, 영알 3대소 기웃~!

 

 

 

영남알프스 3대 소(沼) 파래소폭포

 

래소 폭포는 밀양의 호박소, 철구소와 함께 영남알프스의 3대 沼이다. 파래소폭포는 물기둥이 15m이며 沼의 둘레가 100m 깊이가 3m 정도 된다하 하는데, 이곳은 가뭄이 실할 때 기우제를 지내면 단비가 내려 바라던 대로 이루어진다로 하여 "바래소"라 하다가 "파래소"로 불리워 졌다고 한다.

래소 폭포에 대한 전설은 沼에 명주실을 풀면 한 타래를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전설과 , 파래소와 철구소, 밀양의 호박소는 그 밑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선녀들이 목욕하러 내려올 때면, 이무기가 그 밑을 통해서 자리를 피해줬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아무튼 영남알프스 3대 沼의 전설은 위와 같다.

 

 

영남알프스 3대 소(沼) 시례호박소

 

박소높이 10여미터의 높이에서 낙차하는 폭포로 인해 움푹 패인 소인데, 절구모양을 닮았다 하여 호박소라 하였다고 한다. 둘레는 약30m 시례호박소, 구연폭포, 백련폭포라고도 불리운다. 또한 호박소는 가뭄시 기우제를 지내는 기우소였다고 한다.

영남알프스 3대 沼는 신불산[파래소], 주암계곡[철구소], 백운산[호박소]가 있다.

 

 

 

 

 

영남알프스 3대 소(沼) 철구소

 

구소는 호박소, 파래소와 함께 영남알프스 3대 소(沼)로 꼽힌다. 경남 양산 원동면 선리 장선마을 배내골 주암계곡 아래 약 20km에 있는 와폭으로 형성된 깊은 소()이다. 소의 모양이 절구 모양이라 하여 절구가 철구로 변형되어 부르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선녀들이 목욕하러 올 때면 이 소에 있던 이무기가 물속을 통해 자리를 피해주었다는 설이 있다. 물 깊이는 약 7m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검은 곳이다.

 

 

 

 

영남알프스 3대 沼는 가지산"호박소", 신불산 "파래소", 주암계곡 "철구소"를 말합니다.

 

 

 

♧ 영남알프스 소개 ♧

 

남알프스는 영남 동부지역에 형성된 해발 1,000m 이상의 9개 봉우리 산악군을 영남알프스라 하며, 유럽의 알프스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하여 영남알프스라 부르고 있다. 백두대간 피재에서 분기된 낙동정맥이 이곳까지 뻗어와 해발 1000m이상의 준봉이 힘차게 솟아 있는 영남알프스는 울산광역시, 경북 청도와 경주, 경남 밀양과 양산 5개의 시군에 속해 있다.

경표에는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영남 동부지발을 남북으로 뻗어 내리다 대구 영천분지에서 산세를 낮추다 경주 단석산(827m)에서 고헌산(1,033m)으로 이어지며 다시 1000m 이상의 준봉들이 솟구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남알프스는 1979년 11월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영남알프스 대하여 ♧

 

남알프스는 1000m 이상의 준봉 가지산, 운문산, 천황산(사자봉), 재약산(수미봉), 신불산, 영축산, 간월산(단조봉), 문복산, 고헌산 9봉을 말한다. 명확히 하자면 가지산릉의 상운산(1,114m)까지 더하면 영남알프스 1000m 이상의 준봉은 10봉이라 할 수 있다.

근래, 울주군에서 울주 7봉을 지칭 하는데, 필자는 찬성하지 않는다. 경북, 경남, 울산이면 어떤가, 가지산을 모태로 사방으로 뻗어가는 영남알프스 산릉이 지역적 위치로 동강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음이다.

 

 

얼음골 입구 동의보감 허준 선생 관련_동의각

 

 

 

 

 

 

 

 

 

 

 

 

 

 

 

 

 

 

 

호박소 가는길

 

 

 

백련사

 

 

 

 

 

 

 

 

 

 

 

 

 

 

 

우측에서 본 호박소

 

 

 

 

 

 

 

시례호박소

 

언제 보아도 근사하게 생겼습니다.

 

 

 

 

 

 

 

 

 

 

 

 

 

 

 

 

 

 

 

 

 

 

 

 

 

 

 

 

 

 

 

 

 

 

 

 

 

 

 

얼음골

 

주말 주구장창 내리던 비가 그쳐가며, 운무가 치솟습니다.

 

 

 

 

 

 

 

석남고개 넘으로 본 얼음골

 

 

 

 

 

호박소에서 파래소로 이동...내리던 비는 그치는 듯...!

 

영남알프스 골짝이 말라가고 있었는데, 간만에 풍족한 비가 내렸습니다.

 

 

 

파래소 입구

 

신불산 자연휴양림 입장료를 지불하고 상단에 패킹을 하고 파래소를 향합니다.

 

 

 

 

 

 

 

전망대가 있는 갈산고지

 

이곳을 올 때마다 근대사의 비극이 생각나고...벌써 625전쟁이 있은지도 70주년이 어제 지나고 있습니다.

많은 상처를 품공 있는 곳, 무엇때문에 죽고 죽여야 했는지 지금은 헷갈릴 뿐입니다.

 

 

 

 

 

 

 

백련골(청석골) 계곡 입구

 

 

 

 

 

 

 

 

 

 

 

파래소폭포 본류

 

 

 

 

 

 

 

애물단지_탁상행정의 극치

 

어느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으니 참내원~!

 

 

 

공생 & 괴목

 

 

 

 

 

 

 

 

 

 

 

아연광산

 

비그치며, 후덥지근 한 날씨 평상복 차림인데 땀이 줄줄 흐르네요.

 

 

 

아연광산 단애

 

아연광산 저 석굴은 옛 아연광산 채굴하던 곳을 복월하여 인공동굴로, 동굴길이는 31m로 여름엔 찬바람, 겨울엔 따뜻한 공기가 나온다고 소개하고 있다. 굴안에서 흐르는 물은 절대 마시지 말것이며,,,들어가면 위험하니 주의 바람...이렇게 소개하고 있지만, 철창으로 막아 놓아 출입이 막아 놓았다. 상, 하 두개의 석굴 입구가 입을 벌리고 흰김이 무럭무럭 풍겨나오는데, 무척이나 시원할 듯 합니다.

 

 

 

 

 

 

 

 

 

 

파래소폭포 도착

 

비가 제법 내렸는지 계곡물이 흙탕물이라 아쉽~!

 

 

 

요렇게 푸르고 예쁜 파래소인데...

 

 

 

 

 

 

 

 

 

 

 

 

 

근대사의 비극, 이곳 파래소폭포는 신불산 빨치산의 취사장으로 사용된 곳...!

 

 

↑ 신불산 빨치산 사령부가 있었던 갈산고지

 

불산 빨치산 사령부가 있었던 갈산고지...지금은 팔각정이 있는 곳이다. 신불산 빨치산 지리산 빨치산에 이어 두번째로 치열했던 현대사의 아픔 남아있는 영남알프스 산하, 특히 이곳 배내골 일원이 그들의 본거지라 간략하게 남겨 본다.

6.25 전쟁 당시 신불산 빨치산 대장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부산을 점령하라’는 뜻을 가진 남도부(南到釜, 본명 하준수)였다. 남도부는 1950년 6월 24일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원 300여 명을 이끌고 남하한다. 그는 전투를 계속하며 7월 경북 청도군 운문산에 도착한다. 병력은 130여 명으로 줄었다. 처음에는 주암계곡에, 나중에 681고지인 태봉산에 사령부를 두고 빨치산을 지휘했다. 지리산과 마찬가지로 영남알프스는 1천 미터 이상의 험준한 산세와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었기에 유격활동으로, 무엇보다 부산 경남 일대의 후방을 교란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신불산 빨치산은 북에서 내려온 유격대원을 중심으로 그 후 지방당원을 받아들여 최고 220여 명에 이르게 되고, 전쟁중 합류한 인민군 후퇴병력까지 합쳐져 약 1,000명 가까이 세가 확장되었다. 군경과의 교전 700여 회, 군경 사살 1800여 명, 각종 무기 약탈 800여 정, 각종 실탄 약탈 2만여 발, 민가 방화 100여 호, 민가 습격 500여 호, 군용열차 전복 20여 차량, 군용트럭 소각 또는 파괴가 200여 대에 달하는 등 후방 교란 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남도부의 전투지역은 전쟁 기간 동안 한 번도 인민군에게 점령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적진 한 가운데에서 고립적인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으로 어떤 연락을 해본 적도 없었고, 보고와 지령 그리고 전투장비와 물자의 보급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정규군인 빨치산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총과 탄약은 전투를 통해 노획 가능했지만, 식량은 결국 지역 주민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보급투쟁에는 부대원 60~70명과 당원 20~30명이 동원되기도 했다. 밀양 재약산에 많을 때는 소 32마리를 방목하고, 하루에 2마리를 잡은 적도 있었다. 쌀밥 대신 소고기로 배불리 먹기도 했다. 전투부대들은 교대로 영양보충을 하며 돌아갔다. 하지만 빨치산이 보급투쟁을 하며 지역민에게 주었던 ‘원호증’은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였다. 매일 100여 명이 먹을 식량을 확보한다는 것은 빨치산이나 지역민에게는 엄청난 고역일 수밖에 없다. 당시 지역주민 200여 명이 살상 내지 피해를 입었다.

 

1950년 12월부터 토벌활동이 시작됐다. 언양·삼남·상북 주민을 동원하여 하룻밤 부역으로 미군 비행장을 닦고 정찰기를 띄우기도 했다. 비행기는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산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사자벌에서는 대포를 쏘았다. 1951년 겨울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서자 신불산에 1만 명을 투입하여 토벌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52년 2월과 3월의 신불산 공비 토벌작전과, 6월의 고헌산 옆에 위치한 아미산 작전으로 빨치산은 소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각 산간 오지마을을 소개시켜 빨치산의 보급투쟁을 막았다. 토벌대의 공격 등으로 소위 총에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어 1953년 겨울 대원 수는 37명으로 격감하였다. 결국 남도부는 하산을 결정하게 된다.

 

 

 

 

 

 

 

 

전망대까지 가파른 덱을 올라야...

 

아예 땀으로 범벅을 해서야 전망대까지 올랐네요.

 

 

 

내려다 본 파래소폭포

 

 

 

 

 

 

 

 

 

 

 

 

 

 

전망대도 이렇게 잘 조성되어 있고...

 

 

 

 

 

 

 

 

 

 

 

 

 

 

 

 

 

 

 

 

♣ 전망대에서 본 파래소 영상 ♣

 

 

 

 

 

 

한동안 우렁찬 파래소폭 물기둥을 내려다 보고...

 

홀로 독차지 했던 전망대를 내려섭니다.

 

 

 

 

 

 

 

 

 

 

 

 

 

 

 

하산~

 

 

 

 

 

 

 

 

 

 

 

 

 

 

 

 

 

노루오줌꽃

 

 

 

산수국

비오는 주말, 밍그적 거리다 이렇게 나서 맑은 숨 쉬니 이 또한 치유입니다.

어린시절 살기위해 산을 탈때, 산너머산너머 저곳은 무었이 있을까~궁굼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산을 즐길 수 있으니,,, 산은 참~고맙고 늘~감사함 입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