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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 산행후기 ³°″/국 내 전 체

[1부]지리 삼신산_쌍계사 불일암 불일폭포 국사암 '24.8.24(토)

2024.8.24 (토)

 

때는 더위가 물러나고도 남을 시기인데, 폭염기세는 물러설 기미 없고

무리없는 급조 계획으로 주말 2틀을 지리품에서 노닐어 보았습니다.

 

불일폭포는 전장 60m의 폭포로, 마치 청학이 비상하는 형상으로 보이고

때마침 폭포 수량도 제대로여서 장관인 불일폭포에 오랫동안 심취해 보았습니다.

 

 

 

 

 

완폭대 석각

완폭대는 불일폭포를 즐기고 감상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불일암 아래서 발견 되었다. 이 완폭대 석각은 1,200년 전에 신라시대 학자인 고운 최치원(857~?)이 썼다고 전해지는 ‘완폭대’ 석각을 2018년 5월에 발견하였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은 불일폭포가 보이는 완폭대에서 시를 읊고 푸른 학을 부르며 노닐었다는 청학동 설화가 전해진다.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불일암폭포 그림에도 절벽에 위태롭게 돌출된 완폭대 바위가 묘사돼 있다. 선비들의 유람록 10여편에도 완폭대 석각이 기록돼 있다.

남주헌이 함양군수를 지내면서 1807년에 쓴 ‘지리 산행기’부터 완폭대 기록이 없다. 이 시기 전후로 불일암이 쇠락하거나 지형이 바뀌어 완폭대 석각도 흙에 묻히거나 수풀에 가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완폭대 바위는 무너져 현재 옛 모습을 볼 수 없으나 불일암 아래 숲에 묻혀 있던 완폭대 석각을 발견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불일폭포

불일폭포 2 1폭으로 높이가 무려 60m에 이른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폭포 하단 못이 학담(鶴潭)이라 하고, 협곡을 이룬 석문 아래로 6~7개의 폭포와 소가 연이어지는데 이를 학연(鶴淵)이라 한다. 학연이 연이어지는 협곡을 지금은 불일협곡이라 한다. 불일폭포는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쌍계사에서 3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靑鶴(청학)이란 상상의 새로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으며 날개가 8개로 신선이 타고 다녔다는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새라고 한다.

 

 

 

 

 

 

환학대

환학은 '학을 부른다'란 뜻으로 이곳 환학대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청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로오는 곳이다. 이외에도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쌩계석문, 완폭대, 세이암, 삼신동 바위글씨 등 지리산과 쌍계사 주변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과 관련되었다 전해지는 수많은 유적과 이야기가 전해진다.

 

 

 

 

 

 

불일평전

불일평전은 청학동 이상세계를 꿈꿨던 사람들이 그 이상향 실현을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합니다. 고려시대에 '불일보조국사'께서 계셨다 하여, 불일폭포 불일평전(佛日平田)이라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이곳 불일평전은 산 중턱의 평탄한 지대로 마실 물이 풍부한 곳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이곳 불일평전을 청학동 이상향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곳 불일평전에 1978년부터 30년간 거주한 변규화 확백이 조성한 연못과 소망탑이 남아 있습니다.

 

 

 

 

 

 

♧ 북일암 ♧ ♧ 국사암 ♧

 

 

 

 

 

 

 

쌍계사

쌍계사는 통일신라 840(문성왕2)년에 진감혜소(眞鑑慧昭, 774~850)선사가 당나라 육조혜능조사의 선법을 잇고 귀국해 삼법, 대비 두 화상께서 육조혜능조사의 정상을 봉안한 곳에 조사의 영당(影堂)을 짓고 절을 크게 확장하여 옥천사(泉寺)라 하고 이곳에서 선()과 불교음악인 범패(梵唄)를 가르쳤다고 한다.

쌍계사 문화재로는 국1,  13건, 392(경판 3 368매 포함) 시·도지정 유형문화재 12 1389(경판 30 1375), 문화재자료 5, 국가지정 명승(쌍계사일원과 불일폭포일원)이 있고, 경남 기념물 제61호인 차나무 시배지가 있다.

[출처: 쌍계사 홈피]

 

 

 

 

 

 

 

쌍계사 석탑과 뒤로 마애여래좌상

 

 

 

 

 

 

▣ 산이름: 지리_삼신산 불일폭포

 

▣ 산행지: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산46

              /날머리: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327-2 (쌍계사 주차장_P)

▣ 코   쌍계사주차장_P~ 쌍계사~ 환학대~ 원숭이바위~ 냉연대(마족대)~ 불일평전~ 불일암~ 완폭대(각암)~ 불일폭포~ 

              국사암~ 쌍계사~쌍계사주차장_P~ 뱀사골 이동

             【산행】입산: 14:07~하산: 18:00_4H/ 6.12km

▣ 일   : 2024 8 24()~ 【뱀사골주차장 차박_1박】~ 8 25()

           - 1일차: 하동 지리산 쌍계사 불일암 불일폭포 국사암

           - 2일차: 남원 지리산 뱀사골 물놀이 산행

▣ 날   : 1일차: 맑음 / 2일차: 맑음 (오후 한때 흐림)

▣ 일   조릿대 & 

▣ 이   자가운전【Total: 515km】 출발 8/24(): 10:20~ 도착 6/25(): 20:20

▣ 경   : 쌍계사지구 청운식당: 31,000/ 울산수암시장 강산수제비: 22,500 Total: 53,500 (도로비 & 유류비 별도)

 

 

 

 Photo 후기

급히 만든 김밥

 

달포동안 산행을 못한 터라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하고. 설상가상 지난주 나섯던 몸풀기 산행에서 말벌에 당했던 징크스도 있네요.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하니 별 계획 없이 있다가 급하게 집나설 준비를 하고, 정말 오랜만에 지리품에 들어 힐링하기로 하고 후다닥 짐챙겨서 토요일 늦은 시간에 지리산 품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우선 가본지 오래인 곳 쌍계사와 불일폭포를 탐방하기로 하고 쌍계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빈짐으로 출발 합니다.

하지만 오후 가장 더운 때라 땀 꽤나 흘려야 할 듯 합니다.

 

 

 

 

 

 

쌍계석문

 

쌍계사(雙磎寺)는 신라의 문사 고운(孤雲) 최치원이 글을 읽던 곳이라 합니다. 뜰에 백아름 정도 되는 늙은 회화나무가 있는데 그 뿌리가 북쪽으로 작은 시내에 뻗어 넘어간지라 다리처럼 반석에다 묶어 놓고 절의 승려들이 다리로 삼아 왕래한하였다고 합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쌍계사 입구에 바위 두개가 대문처럼 서 있는데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 네 글자를 크게 써놓았고, 절 앞에도 오래된 비가 있는데 모두 고운 최치원이 쓴 것이고 비문도 그가 직접 지은 것이라 합니다. 좌측 바위에 '쌍계' 우측 바위에 '석문'이라 크게 각암되어 있습니다.

 

 

 

 

 

 

쌍계

 

 

 

 

 

 

 

석문

 

 

 

 

 

 

 

쌍계사 앞 안내도

 

불일폭포까지 이어지는 옛길을 '이상향을 찾아가는 청학동 테마길'이라 이름지었네요.

 

 

 

 

 

 

쌍계사 중앙을 흐르는 작은 계곡

 

 

 

 

 

 

쌍계사 노거수

 

 

 

 

 

 

보수 중인 쌍계사 일주문

일주문은 속세를 떠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신을 수양하고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쌍계사 일주문은 조선 1641(인조 19)년에 벽암 화상이 지었다고 하며, 1977년에 고산 화상이 손질하여 고쳤다고 하는 보물이라고 합니다. 일주문 현판에는 '삼신산상계사'라는 현판에 걸려 있어요.

 

 

 

 

 

 

쌍계사 중앙에 흐르는 계곡

 

 

 

 

 

 

 

 

 

 

 

 

 

 

 

 

 

 

 

 

쌍계사 금강문

금강문은 일주문을 지나 두 번째로 나오는 문입니다. 불법을 수호하고 악을 물리치는 금강력사가 모셔져 있는 문으로, 쌍계사 금강문은 840(신라 문성왕 2)에 진감 선사가 창건 당시에 처음 지었습니다. 조선 1641(인조 19)년에 벽암 화상이 고쳤으며, 문 앞에는 벽암이 쓴 현판이 있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979년에 고산 화상이 손질하여 고친 것입니다. 

 

 

 

 

 

쌍계사 천왕문

 

 

 

 

 

 

쌍계사 천왕문

천왕문은 절에 들어설 때 일주문과 금강문 다음으로 지나게 되는 세 번째 문으로, 사천왕을 모신 문입니다. 사천왕은 부처님께 귀의(믿고 따름)하여 불법을 수호하고, 수도승과 불자를 돕는 4명의 수호신입니다.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여기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에는 증장천왕(增⾧天王), 서쪽에는 광목천왕(廣⽬天王), 북쪽에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있습니다. 쌍계사 천왕문은 조선 1740(숙종 30)년에 백봉 화상이 지었고, 1825(순조 25)년에 고쳐 지었으며, 1978년에 고산 화상이 다시 고쳐 지었습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126호]

 

 

 

 

 

 

사천왕문

 

 

 

 

 

 

 

 

 

 

 

 

 

 

쌍계사 9층 석탑

 

 

 

 

 

 

쌍계사 9층 석탑

쌍계사 9층석탑은 고산 화상께서 인도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스리랑카에서 직접 모셔온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 3과, 산내 국사암 후불탱화에서 출현한 부처님의 진신사리 2과 그리고 전단나무불상 일존을 모신 것입니다.
발심 서원한 백창기 김반야성 부부의 단독 시주로 불기 2531년(서기 1990년) 3월 15일에 완공했습니다.

 

 

 

 

 

 

 

 

 

 

 

 

 

쌍계사

쌍계사는 개산(산문을 열다.)과 창건 둘로 나눠집니다.

개산은 통일신라 723(성덕왕22)년에 삼법(三法), 대비() 두 스님이 중국선종의 6대조인 육조혜능조사의 정상(두상)을 모시고 설리갈화처(雪裏葛化處,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에 정상을 봉안한 것이 ‘개산’입니다.

 

창건은 통일신라 840(문성왕2)년에 진감혜소(眞鑑慧昭, 774~850)선사가 당나라 육조혜능조사의 선법을 잇고 귀국해 삼법, 대비 두 화상께서 육조혜능조사의 정상을 봉안한 곳에 조사의 영당(影堂)을 짓고 절을 크게 확장하여 옥천사(泉寺)라 하고 이곳에서 선()과 불교음악인 범패(梵唄)를 가르쳤습니다.

 

진감혜소선사가 창건하기 전인 통일신라 828(흥덕왕2)년에는 대렴공이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차나무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처음 심은 차나무를 화개 일대에 번식시키고 77세로 입적()하니 승납(僧臘) 41세였습니다. 그 후 헌강왕(獻康王)은 이웃 고을에 옥천사가 있어 사람들이 미혹할까 염려하다가 산문밖에 두 시내가 만나 흐르니 ‘쌍계사’라는 사찰 이름을 내려 지금에 이릅니다.

 

일찍이 통일신라시대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 선생은 쌍계사를 ‘호리병 속의 별천지(壺中別有天地)’라고 극찬을 했고, 그 옛날 이상세계를 꿈꿨던 사람들이 그 실현을 위해 살았던 곳을 ‘청학동’이라고 하는데 청학동이 바로 불일산방 아래에 있습니다.

 

서산대사의 중창기를 보면 중섬(中暹), 혜수(蕙修)스님의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후 벽암(碧巖), 소요(逍遙), 인계(印械), 법훈(法訓), 용담()스님 등이 중창을 하였고, 이후 1975년부터 고산()대선사에 의해 복원(復元), 중수(重修) 중창(重創)을 거쳐 현재와 같은 대가람(가치가 높거나 규모가 큰 절)의 사격을 갖추게 됐습니다. 쌍계사에는 국사암, 불일암, 도원암, 덕봉암, 응봉암 등 산내암자가 있고, 그 외에도 죽기 전에는 나오지 말라는 상사관원과 하사관원이 있으며 청학동에는 불일산방이 있습니다.

 

문화재로는 국보 1, 보물 13 392(경판 3 368매 포함), 시·도지정 유형문화재 12 1389(경판 30 1375), 문화재자료 5, 국가지정 명승(‘쌍계사일원’과 ‘불일폭포일원’)이 있고, 경상남도 기념물 제61호인 차나무 시배지가 있습니다. [출처: 쌍계사 홈피]

 

 

 

 

 

 

 

 

 

 

 

 

 

쌍계사 범종루

 

 

 

 

 

 

 

개울을 건너 금당쪽으로...

 

우선 불일폭포를 다녀 오기로 하고, 쌍계사는 이후 소개하기로 합니다.

 

 

 

 

 

 

금당 가는 문

 

불일폭포는 우측으로 올라 갑니다.

 

 

 

 

 

 

 

 

 

 

 

 

 

 

 

 

 

 

 

 

지리산 청학동 이야기

 

 

 

 

 

 

 

 

 

 

 

 

 

 

 

 

 

 

 

 

 

불일폭포 가는 길

 

급한 오르막은 아니지만 바람한점 없고, 가장 더운 오후 3시경이니 땀이 비오듯 하네요.

 

 

 

 

 

 

 

 

 

 

 

 

 

아담한 계곡에 흐르는 계곡물

 

물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오지만 무지하게 덥네요.

 

 

 

 

 

 

커다란 바우가...

 

 

 

 

 

 

돌다리도 건너고...

 

 

 

 

 

 

 

 

 

 

 

 

 

폭염을 물소리에 달래가며...

 

 

 

 

 

 

환학대 도착

 

 

 

 

 

 

환학대와 청학에 대하여...[클릭: 크게보기]

 

 

 

 

 

 

환학대 바우에 새겨진 이름

 

 

 

 

 

 

 

 

 

 

 

 

 

 

 

 

 

 

 

 

환락대와 비

환학은 '학을 부른다'란 뜻으로 이곳 환학대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청학을 불러 타고 다녔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로오는 곳이다. 이외에도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쌩계석문, 완폭대, 세이암, 삼신동 바위글씨 등 지리산과 쌍계사 주변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과 관련되었다 전해지는 수많은 유적과 이야기가 전해진다.

 

 

 

 

 

 

멀지 않은 곳 원숭이바위 도착

 

 

 

 

 

 

원숭이바위

 

 

 

 

 

 

원숭이바위에서 희미한 이름은 '이언경, 홍연'

 

1558년 4월 19일, 청학동 불일폭포로 오르던 남몀 조식(1501~~1572)은 이 바위에 새겨진 '이언경, 홍연'이라는 이름을 보고서, 실질을 무시한 채 헛된 이름을 후세에 전하려는 속인들에게 아래와 같이 준엄한 일침을 내렸다. 남명의 이 한 마디는 지리산을 찾은 후인에게 유람 지침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장부의 이름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 두고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나 너구리가 사는 숲 속의 바위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까마득히 잊힐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가 버린 그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찌 알겠는가?"

[조식, 유두류록 중에서]

 

 

 

 

 

 

원숭이바위 전경

 

 

 

 

 

 

 

 

 

 

 

 

 

 

 

 

 

 

 

 

휴~엄청 더워요...!!!

 

계곡 물소리에 냉기를 느껴봅니다.

 

 

 

 

 

 

 

 

 

 

 

 

 

 

 

 

 

 

 

 

냉연대(마족대) 도착

 

앞 계곡에는 시원한 작은 폭포가 낙차하고 있는 곳으로 다른곳 보다 시원기운을 느낄 수 있어요.

 

 

 

 

 

마적데 밀빌굽 흔적

쌍계사에서 불일평전으로 오르는 1.7km 지점에 위치한 이 바위는 높이 5m, 폭6m, 두께10m 크기를 보입니다. 바위 위에 오르면 계곡에서 일어나는 사원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하여 냉연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위 위에 말발굽 같은 홈이 있어 마족대라 불리기도 합니다.

1744년 진주에서 출발해 쌍계사와 불일암을 다녀간 황도익(1678~1753)은 이곳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5리를 가니 냉연대가 있었다. 마적암이라고도 하는데, 바위 위에 용마의 자취가 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선선이 말을 달리던 곳이라고 한다."

 

 

 

 

 

 

냉연대(마족대) 설명문 (전문: 위에 옮김)

 

 

 

 

 

 

 

 

 

 

 

 

 

냉연대 아담한 폭포

 

땀이 줄줄 흐르니 저 폭포수 밑에 들어서고 싶지만 참기로 합니다.

 

 

 

 

 

 

마족대 노송

 

 

 

 

 

 

 

 

 

 

 

 

 

다시 계속 오르기...

 

 

 

 

 

 

 

 

 

 

 

 

 

불일평전 마을입구 거송과 장승

 

 

 

 

 

 

불일평원 안내판

 

정말 이상향 상상의 세계 청학동이 있을까 !

지리는 세석평원까지 민초의 삶의 터전이었지요.

지리산이라 부르기 전에는 방장산, 두류산 이었고요.

어리석은 사람이 들면 지혜로워진다는 지리산 입니다.

분며한건 지리에 들면 포근하다는 것 어머니 품속처럼 !

 

 

 

 

 

 

불일평전

불일평전은 청학동 이상세계를 꿈꿨던 사람들이 그 이상향 실현을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합니다. 고려시대에 '불일보조국사'께서 계셨다 하여, 불일폭포 불일평전(佛日平田)이라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이곳 불일평전은 산 중턱의 평탄한 지대로 마실 물이 있는 곳으로,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이곳 불일평전을 청학동 이상향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곳 불일평전에 1978년부터 거주한 변규화 확백은 연못도 만들고 돌탑도 쌓았다고 합니다. 

 

 

 

 

 

 

불일평전 소망탑

 

이젠 숲이 우거지며 돌탑들이 외소해 보입니다.

 

 

 

 

 

소망탑

 

 

 

 

 

 

 

연못의 소나무

 

물속에서도 소나무가 잘 살고 있어요.

 

 

 

 

 

 

불일산방

 

앞에는 시원한 물이 콸~콸 나오네요.

이런곳에서 한달만 살아도 좋겠어요.

 

 

 

 

 

 

불일산방

천년 전,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학을 타고 다녔다는 청학동이라는 곳에 위치하며, 청학동은 이상세계를 꿈꿨던 사람들이 그 실현을 위하여 모여 살던 곳입니다. 고려시대에 불일보조국사께서 계셨다 하여 불일폭포 불일평전(佛日平田)이라 불렸고, 이곳에 작고 소박한 집이 있는데 이집이 바로 불일산방입니다. 불일산방은 심신을 달래며 공부하는 곳으로, 요즘의 ‘카페’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남명 조식(1489년)은 ‘두류록’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쌍계사 동쪽으로
가파른 바위와
위태로운 길을 오르면
꽤 널찍하고 평평하여
농사짓기에 알맞은
곳이 있다.

여기가 세상에서 말하는 청학동이다.

 

 

 

 

 

불일산방 앞 시원한 물

 

 

 

 

 

 

 

불일평전 쉼터 취사장

 

그 옆에는 넓은 화장실도 있어요.

목도 축이고 불일폭포로 갑니다.

 

 

 

 

 

 

 

 

 

 

 

 

 

삼거리 

 

좌측은 삼신봉, 지리 남부능선 가는 길, 우측으로 불일폭포로 갑니다.

 

 

 

 

 

갑자기 험해지는 길

 

우측으로 천길 벼랑위를 갑니다.

 

 

 

 

 

 

낙석위험 안전 철망

 

보기에는 그닥 좋지 않자만 벼랑 바위암질이 워낙 잘 깨지는 암질이라 꼭 필요한 시설인 듯 합니다.

 

 

 

 

 

 

 

 

 

 

 

 

벼랑길

 

협곡 실폭을 건너 감아 돌면...좌측 위로 소박한 불일암 석축이 보입니다.

 

 

 

 

 

 

우선 불일암

 

불일암 석축이 아주 섬세하게 쌓아져 있어요.

 

 

 

 

 

불일암 대문

 

항상 열려 있는 대문입니다.

 

 

 

 

 

 

불일암

불일암은 쌍계사 뒤 청학동 산기슭 10리 남짓한 곳에 있습니다. 진감선사가 창건했으나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가 머물렀다하여 불일암이라 이름지어졌습니다. 불일암에는 상불일암, 중불일암, 하불일암이 있는데 상·중불일암은 터만 있고 현재의 암자는 하불일암으로서 페허가 된 터에, 서기 1911(신해년)년에 본사의 양용은(梁龍隱)스님이 복원하여 현재에 이릅니다. 불일암에 가는 길은 깎아지른 골짜기가 끊어진 듯이 높고 시내를 가로질러가는 길이 없는 좁고 굽은 절벽이라 가히 한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만하다고 합니다. 언덕에 달아맨 듯하며, 수백길 낭떠러지 아래에 두 연못이 있는데 깊이를 가히 헤아릴 수 없다, 라고 합니다.

 

남명(南溟) 조식(曹植)의 『두류록頭流錄』에 이렇게 전합니다.

 

“동쪽으로 높고 가파르고 험준하여 조금도 서로 양보하지 않을 듯 버티고 있는 산이 있으니 향로봉(香爐峰)이요. 서쪽으로 푸른 언덕을 깍아 세운 듯 만길 절벽처럼 서 있는 산이 있으니 비로봉(毘盧奉)이다.

두서너 마리의 청학이 바위틈에서 때때로 날아 나와 위아래로 빙빙 돌며, 아래에는 검푸른 빛을 띤 못이 있는데 밑이 없는 듯이 깊다.

좌우와 상하로 층층 절벽이 둘러 있으며, 갑자기 돌았다가 갑자기 합해지는 바람과 우레가 서로 싸우는듯하고, 땅이 닫히고 사람이 열린 듯도 하며,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며 석수(水石)도 구별할 수 없다.

이는 신선의 무리와 큰 힘을 가진 교룡과 작은 거북이 함께 숨어 있는 집을 감추고 영원토록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가까이 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소박한 의자

 

투박하지만 참 멋스러운 의자입니다.

요사채 앞 쉬어가시라...이렇게 놓여져 있습니다.

스님을 출타중이시고, 절간엔 폭포소리만 요란 합니다.

 

 

 

 

 

 

불일암

 

 

 

 

 

 

 

불일암

 

 

 

 

 

 

불일암 석탑

 

 

 

 

 

 

 

 

 

 

 

 

 

 

 

 

 

 

 

 

 

불일암 장독

 

살짝 열어보고 싶은 충동, 아담한 장독 입니다.

아마도 단지엔 된장과 간장이 있을 듯 하네요.

 

 

 

 

 

불일암 옆 아늑한 곳

 

 

 

 

 

 

불일암에서 보이는 비로봉(청학봉)

 

불일암은 쌍계사와 함께 조선시대 지리산을 유람한 선비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명승지아자 청학동을 대표하는 장소 입니다. 암자 인근에 불일폭포와 완폭대가 있고, 좌우로 청학봉과 백학봉이 있습니다. 청학동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는 이곳이 신선 세계, 또는 이상향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줍니다, 라고 소개하고 있네요.

 

길일손(1464~1498) 『두류록頭流錄』에 이렇게 전합니다.

 

등구사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16일이 지났다. 지나는 곳마다 온갖 바위들이 빼어남을 다투고 많은 골짜기물이 다투어 흘러 기뻐하고 놀랄 만한 경치가 한둘이 아니였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 한 곳 뿐이었다. 또 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인로가 찾던 곳이 여기가 아닐까 의심했다.

 

 

 

 

 

 

 

 

 

 

 

 

불일암을 나서...

이제 최치원이 각암했다는 '완폭대' 각암을 찾아 봅니다.

 

 

 

 

 

 

저기에 완폭대 안내판

 

안내판에 있는 곳에 내려서니 각암이 있을만한 바위는 보이지 않아요.

 

 

 

 

 

 

드디어 찾은 "완폭대"

 

안내목이 있어 금방 찾았고, 각암이 있는 바위 주변 대숲을 정리해 놓았네요.

계속 대숲에 가려져 있었다면 영원히 찾지 못했을 것 같은 작은 바위입니다.

 

 

 

 

 

 

완폭대 각암

 

안내판이 있는 위에, 폭포가는 길 좌측으로 있어요.

 

 

 

 

 

완폭대 각암

완폭대는 불일폭포를 즐기고 감상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불일암 아래서 발견 되었다. 이 완폭대 석각은 1,200년 전에 신라시대 학자인 고운 최치원(857~?)이 썼다고 전해지는 ‘완폭대’ 석각을 2018년 5월에 발견하였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은 불일폭포가 보이는 완폭대에서 시를 읊고 푸른 학을 부르며 노닐었다는 청학동 설화가 전해진다.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불일암폭포 그림에도 절벽에 위태롭게 돌출된 완폭대 바위가 묘사돼 있다. 선비들의 유람록 10여편에도 완폭대 석각이 기록돼 있다.

남주헌이 함양군수를 지내면서 1807년에 쓴 ‘지리 산행기’부터 완폭대 기록이 없다. 이 시기 전후로 불일암이 쇠락하거나 지형이 바뀌어 완폭대 석각도 흙에 묻히거나 수풀에 가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완폭대 바위는 무너져 현재 옛 모습을 볼 수 없으나 불일암 아래 숲에 묻혀 있던 완폭대 석각을 발견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완폭대를 지나...불일폭포

 

폭포소리 우렁찬 계곡으로 급격한 덱계단 내려섭니다.

물소리 웅장한 불일폭포 물기둥이 시원하게 보입니다.

 

 

 

 

 

불일폭포 도착

 

 

 

 

 

 

와~우~~~!

 

불일폭포 웅장함에 환호 합니다.

 

 

 

 

 

 

불일폭포

 

용이 비상하는 듯, 청학이 비상하는 듯...형세가 범상치 않습니다.

청학의 머리, 목 중간 날개 꼬리, 아래 넓은 소는 학담이라고 합니다.

오래전 폭포를 볼 때와 사뭇 다른 느낌, 그때는 이곳의 역사를 몰랐으니 당연하겠죠. 

 

 

 

 

 

불일폭포

불일폭포 2 1폭으로 높이가 무려 60m에 이른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폭포 하단 못이 학담(鶴潭)이라 하고, 협곡을 이룬 석문 아래로 6~7개의 폭포와 소가 연이어지는데 이를 학연(鶴淵)이라 한다. 학연이 연이어지는 협곡을 지금은 불일협곡이라 한다. 불일폭포는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쌍계사에서 3km 지점에 있다.

靑鶴(청학)이란 상상의 새로 사람의 몸에 새의 부리를 하고 있으며 날개가 8개로 신선이 타고 다녔다는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새라고 한다.

 

 

 

 

 

 

 

 

 

 

 

 

 

 

 

 

 

 

 

 

 

 

 

 

 

 

 

 

아무리 보아도 멋지기만...

 

 

 

 

 

 

 

 

 

 

 

 

▶ 영상_불일폭포

 

 

 

 

 

 

▶ 영상_불일폭포

 

 

 

 

 

 

 

 

 

 

 

 

 

 

흠뻑 땀 흘려 도착한 불일폭포

 

뜨거운 폭염에 하염없이 땀을 박아지로 흘렸네요.

뷰에 담고 또 담고, 독차지한 불일폭포를 오랜동안 즐깁니다.

 

 

 

 

 

 

 

 

 

 

 

 

 

 

 

 

 

 

 

 

 

 

 

 

 

 

 

 

 

 

 

 

 

 

 

 

 

 

 

 

 

 

 

 

 

 

 

 

 

 

 

 

 

 

▶ 영상_불일폭포

 

 

 

 

 

 

▶ 영상_불일폭포

 

 

 

 

 

 

 

 

 

 

 

 

 

 

불일폭포를 떠나오며...

 

마음은 아래 불일협곡을 들여다 보고 싶지만,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니 꾹~참고 폭포를 나섭니다.

 

 

 

 

 

 

다시 '완폭대' 각암

 

 

 

 

 

 

이렇게 보니 더 선명하고...

 

 

 

 

 

 

완폭대 각암

 

이 각암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빨리 와 보고 싶었는데, 소원성취하고 나섭니다.

 

 

 

 

 

 

 

 

 

 

 

 

 

삼거리

 

좌측 조릿대 숲으로 희미한 길을 따르면 비로봉(청학봉)으로 갈수 있지만, 또 참고 내려갑니다.

 

 

 

 

 

 

불일평전

 

시원한 샘에서 등목도 하고 더위를 식히고 갑니다.

 

 

 

 

 

불일평전 화장실

 

 

 

 

 

 

쉬여가고 싶은 풍경

 

 

 

 

 

 

불일평전 목장승

 

 

 

 

 

 

 

 

 

 

 

 

 

 

 

 

 

 

 

 

 

 

 

 

 

 

 

 

 

 

 

 

 

 

국사암 가는 길 돌무더기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니 국사암도 다녀오기로 합니다.

 

 

 

 

 

 

국사암 가는 언덕빼기 돌무더기

 

 

 

 

 

 

국사암으로 이어지는 비탈길 풍경

 

 

 

 

 

 

국사암 사천왕수 느티나무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두었더니 살아서 나무가 되었다는 1,200이 넘은 느티나무(사천왕수四天王樹 경상남도 보호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국사암 대문

 

 

 

 

 

 

국사암

국사암은 통일신라 723(성덕왕 22)년에 운암사(雲巖寺)의 삼법화상이 터의 지기가 뛰어나므로 육조의 정상을 봉안하고 당우를 지은 것이 암자의 시초입니다. 그 후 110년이 지나서 진감선사(眞鑑禪師)가 창건했습니다. 국사암이라는 사명(寺名)도 진감국사와 관련이 깊은데, 신라 민애왕이 진감선사를 스승으로 봉하여 진감국사라 칭함으로 인해 국사암이라 부르게 됐습니다. 또한 상주 장백사(현 남장사)에서 지리산으로 온 진감선사가 삼법화상의 난야터에 당우를 세운 것이 국사암으로, 오히려 본사인 쌍계사보다 먼저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이상은 여러 이설이 있음) 또한 암자에는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두었더니 살아서 나무가 되었다는 천이백년이 넘은 느티나무(사천왕수四天王樹 경상남도 보호수)가 있어 이를 증명하는 듯합니다.

 

국사암은 1781(정조 5)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홍탱과 제석천룡탱은 통정(通政) 성찰(晟察)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취일(取一)스님이 화주가 되어 조성하였다. 전자는 금어 함식(咸湜)스님이 그린 것으로, 함식스님은 이외에도 같은 해에 그린 쌍계사 삼세후불탱 3축과 삼장탱 조성에도 동참했다. 후자는 화기에 ‘제석천룡합위帝釋天龍合位’라 기록되어 있어 제석천룡탱임을 알 수 있는데, 금어 평삼(評三)스님과 찰삼(察森) · 극찬(極讚) · 출정(出定) · 계탁(戒卓) 스님 등이 조성했다. 평삼스님은 쌍계사 삼세탱 가운데 아미타탱과 석가모니탱에는 편수로 참여했고, 약사탱에는 화주로 참여했으며, 삼장탱은 화주 겸 편수로 참여하고 있다. 1897년에 조성된 칠성탱의 화기를 보면 본암질로 24명의 스님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많은 스님들이 머물면서 수도 정진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국사암 샘

 

 

 

 

 

 

 

 

 

 

 

 

 

 

 

 

 

 

 

 

 

 

 

 

 

 

 

국사암 해우소

 

변소에 가는 다리가 완전 멋지네요.

 

 

 

 

 

국사암 사천왕수 느티나무

 

아래서 보니 더 경이롭기만 합니다.

1200살을 넘었다니 신기하기만 합니다.

 

 

 

 

 

 

국사암 사천왕수

 

 

 

 

 

 

다시 쌍계사로...

 

오래된 연륜이 묻어나는 커다란 돌무더기, 맨 위에 놓여진 돌은 어떤 의미일까 !

 

 

 

 

 

 

쌍계사 내려가는 길

 

바위에 나무아미타불 각암이 보이네요.

 

 

 

 

 

 

쌍계사 도착

 

 

 

 

 

쌍계사 청학루

 

이 건물은 진감선사가 창건당시에 지은 건물로, 1930년 쌍계사 주지 손민선사가 중수한 맞배지붕의 2층 누각이며, 1985년 지붕 기와를 한 차례 보수했습니다. 초심자初⼼者 스님들의 수행 장소로 사용된 곳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백곡도인⽩⾕道⼈의 청학루 수행기문이 있습니다. 또한 1902년 8월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남쪽을 여행할 때 이 지방의 사림 32명과 주지 1명과 함께 창수시(唱酬詩)를 짓고 음사(吟社)를 창립하여 청학루음사(⾭鶴樓吟社)라 하였는데, 그 현판이 청학루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청학루 기둥

 

청학루 오래된 기둥이 예사롭지 않네요.

모든 건물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네요.

 

 

 

 

청학루를 지나 오르면...팔상전

 

 

 

 

 

 

쌍계사 팔상전

팔상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회화)나 조각상을 모시는 전각입니다. 쌍계사 팔상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크기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 지붕의 건물입니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다포계 건물로,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형식으로 지어졌습니다. 기둥이 높고 기둥 사이의 간격이 넓어 대웅전과 같은 웅장함이 느껴집니다. 건물 안의 기둥머리에는 장식이 많은데, 그 장식들을 안쪽으로 피어오르는 것처럼 만들어 공간이 웅장하고 화려해 보입니다. 또한, 천장은 격자 모양으로 짜 맞춘 우물정(井)자 천장이며, 가운데로 갈수록 점차 올라가는 층단을 두어 시야가 트이게 했습니다. 불상을 모셔 둔 불단 뒤에는 영산회상도와 팔상도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 전각은 고려 충렬왕 16년(1290)에 진정 국사가 처음 세우고 나서 여러 차례 손질하고 고쳤는데, 지금의 건물은 1978년에 고산 화상이 고친 것입니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금당

 

저녁시간에 다 되었는데도 더위가 식지 않아 힘듭니다.

 

 

 

 

 

쌍계사 금당

육조정상탑전은 쌍계사의 개산(처음으로 산문을 연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삼법과 대비 두 화상이 신라 성덕왕 22년(723)에 중국 불교 선종의 제6대조인 혜능 조사의 정상(頭上:두상)을 모시고 와서,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에 봉안하라”는 불보살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곳을 찾아와 정상을 봉안하고 산문을 연 데서 유래했습니다. 그 후 신라 문성왕 2년(840)에 진감 선사가 쌍계사 창건 당시에 건물을 짓고 육조영당이라 했습니다. 건물 안에 있는 육조정상탑은 7층으로 용담 선사가 세웠다고도 하며, 주변 목압사 터에서 옮겨 왔다고도 합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입니다. 건물을 받치는 기단 없이 툇마루를 두어 지면과 떨어뜨린 것이 특징입니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형식으로 지어졌습니다. 기둥 간격이 매우 좁고 높이가 낮아 건물이 작은 데 비해, 기둥머리의 장식이 많고 커서 화려하고 장중해 보입니다. 천장은 낮지만 건물 안의 기둥 장식들을 중앙으로 피어오르는 것처럼 만들었고, 탑의 위쪽에는 작은 집 모양의 닫집을 만들어 장엄한 느낌을 줍니다. 건물의 앞쪽에는 조선 후기 명필인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려있으며, 지금의 건물은 고산 화상이 1979년에 고쳐 지은 것입니다. 쌍계사 건물 가운데 균형미가 가장 돋보입니다.

 

 

 

 

 

금당에 모셔진 육조정상탑전

 

 

 

 

 

금당에서 보이는 풍경

 

남부능선 자락이 보입니다.

 

 

 

 

 

 

 

 

 

 

 

 

금당에서 내려서 대웅전으로...

 

 

 

 

 

범종루

 

 

 

 

 

 

 

대웅전 가는 길

 

 

 

 

 

 

대웅전 앞 국보는...?

 

그런데 진감선사대공령탑비 국보가 없네요,

 

 

 

 

 

 

 

 

 

 

 

 

 

쌍계사 대웅전

쌍계사 대웅전은 진감 선사가 신라 문성왕 2년 (840) 창건 당시에 세운 건물인데 임진왜란(1992-1598) 때 불탔던 것을 조선 1632(인조 10)년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으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쌍계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에는 삼존불과 사보살을 모셨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마주하고 서있는 정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우측에는 약사여래불을, 좌측에는 아미타불 등 삼존불을 모셨고, 석가모니불 좌우에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을, 약사여래불 우측에 일광보살을 그리고 아미타불 좌측에는 관세음보살 등 사보살을 모셨습니다. 이렇게 삼존불 사보살을 모신 단을 상단이라 하고, 좌측으로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제자들을 수호한다는 화엄신장을 모신 단을 중단 또는 신중단이라 하고, 맨 왼쪽에 영가(돌아가신분)를 모신 단을 하단 또는 영단이라고 합니다. 쌍계사 대웅전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입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며, 기둥이 높아 전체적으로 건물의 규모가 크게 느껴집니다. 건물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고, 불단 위로는 지붕 모양의 닫집을 화려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조선 시대 불교 건축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와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석탑과 마애불

 

 

 

 

 

 

쌍계사 마애불

마애불은 암벽에 새긴 불상을 일컫는 말로, 쌍계사 마애여래좌상은 고려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큰 바위에 불상을 두꺼운 돋을새김으로 새기고 불상 둘레를 깊이 파내어, 불상을 작은방에 모셔 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머리가 크고 얼굴에 살집이 많으며 귀가 어깨까지 처진 모습이 자비로워 보입니다. 손은 옷으로 덮여 있으며, 전체적인 모습이 아주 소박하여 부처님이라기보다는 스님처럼 보이는 특이한 약사여래불입니다.

 

 

 

 

 

 

 

 

 

 

 

 

 

 

 

 

 

 

 

마애불과 대웅전

 

 

 

 

 

 

대웅전 뒤 금강계단

 

 

 

 

 

 

쌍계사 금강계단 삼불

 

 

 

 

 

 

 

 

 

 

 

 

 

쌍계사 화엄전

화엄전은 경판을 봉안한 전각으로 쌍계사 목판 대장경을 봉안했습니다.

쌍계사에는 1603년에 제작된 보물 선원제전집도서 22판, 1604년에 제작된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11판, 1611년에 제작된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335판 등 총 368판 국가지정 문화재가 있고, 지방문화재로는 30종 1,375판이 있습니다. 전체 수량은 불경과 불교 관련 서적 등 총 33종 1,743판입니다. 쌍계사는 해인사 다음으로 많은 경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대장경판은 주로 1603년에서 1903년 사이에 여러 차례 제작된 것입니다. 쌍계사의 말사인 능인암에서 제작하여 쌍계사로 옮겨온 것과 쌍계사 본사와 국사암, 칠불암 등에서 제작한 것이 있습니다. 능인암 판은 대부분 1603년~1604년에, 국사암 판은 1903년에 제작 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17세기와 18세기에 간행됐습니다. 쌍계사 화엄전에 봉안된 목판대장경은 쌍계사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하여 400여년에 걸친 목판대장경의 변천사를 보여줍니다.
한편,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 선사 대공탑비가 일부 훼손되어 있지만, 조선조 영조 2년(1726) ‘유당신라국지리산쌍계사교시진감선사비명병음각(有唐新羅國智異⼭雙磎寺敎諡眞鑑禪師碑銘幷陰刻)’의 목판이 있으므로 그 내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쌍계사 목판대장경은 각 시기에 읽힌 불경의 종류와 당대를 살았던 고승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불교 문화유산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대웅전 앞 팔영루

 

 

 

 

 

 

대웅전 앞 당간지주, 석등, 석탑, 마애불

 

 

 

 

 

 

국보는 보수 중

 

국보인 "진감선사대공령탑비"는 보수 중 이라 아쉽네요.

해서 붙어 놓은 사진을 담아 아래와 같이 기록해 봅니다.

 

 

 

 

 

 

국보 제47호로 지정된 진감선사대공령

쌍계사 “진감선사대공령탑비"는 신라 말의 명승 진감선사 혜소(慧昭)의 덕을 기려 세운 탑비로, 887(진성여왕 1)년에 세워졌습니다. 선사의 속성은 최 씨로, 804(애장왕 5)년에 당나라로 가서 신감대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고, 830(흥덕왕 5)년에 중국 선종의 법맥을 잇고 신라로 돌아와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지금의 쌍계사인 옥천사에서 입적했습니다. 헌강왕(885)은 혜소에게 진감선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진감선사대공령탑이라는 탑호를 내려 탑비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이 비석의 글은 왕명으로 최치원이 짓고 쓴 사산비명(四⼭碑銘) 가운데 하나로, 당대의 문장 연구와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참고 자료로서 가치가 높습니다. 전체 높이는 363㎝, 비석 몸체의 높이는 213㎝, 너비는 약 100cm, 두께는 22.5㎝입니다.

 

 

 

 

 

 

 

 

 

 

 

 

 

설선당 백일홍

 

 

 

 

 

 

노거수

 

 

 

 

 

 

범상치 않은 쌍노거수

 

 

 

 

 

 

절 중앙에 큰 바위

 

 

 

 

 

 

쌍계사 9층 석탑

 

 

 

 

 

 

 

쌍계사 나서며...

 

저녁시간이 되어서야 쌍계사를 나섭니다.

주차장 앞 계곡에서 흘린 땀도 씻어내고..!

 

 

 

 

 

▶ 영상_미역

 

 

 

 

 

 

 

식당가

 

지리 남부능선이 보이고...이제 막 지리는 어둠이 스며들고 있네요.

 

 

 

 

 

 

멀리갈 필요 없이 쌍계사 앞 식당가 청운식당에서 저녁식사 합니다.

더덕구이 정식, 1인 15000원 음식이 참 정갈하게 차려지네요.

 

그리고 어둠에 잠긴 지리산, 노고단 성삼재를 넘어 뱀사골로 이동을 합니다.

 

 

 

 

청운식당 더더구이 정식

 

《end》